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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Ecology)와 경제(Economics) 그리고 윤리(Ethics)가 하나가 되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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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6. 12:11 Ethics

[유레카] 파르헤지아 / 고명섭
유레카

 

 

‘파르헤지아’(parrhesia)는 생의 말기에 미셸 푸코(1926~1984)가 혼신의 힘으로 탐험했던 철학적 주제였다. 에이즈가 온몸을 난타하던 때에 푸코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마지막 강의 제목을 ‘진실의 용기’라고 붙였다. ‘진실의 용기’란 말하자면, 파르헤지아의 가장 간명한 번역어다. 푸코는 고대 그리스의 현인들에게서 파르헤지아라는 용어를 끌어왔다. 푸코의 설명을 따르면, 고대 현인들에게 파르헤지아는 자기 자신을 윤리적 주체로 만드는 핵심적인 실천 행위 가운데 하나였다.

파르헤지아를 풀어쓰면, ‘솔직하게 숨김없이 진실 말하기’를 뜻하지만,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다 파르헤지아인 것은 아니다. 파르헤지아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위험을 불러올 때에도 그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용기야말로 파르헤지아를 파르헤지아답게 만들어주는 미덕이다. “파르헤지아 속에서 화자는 (궤변으로) 설득하기가 아니라 솔직하게 말하기를 선택하며, 거짓이나 침묵이 아니라 진실을 선택하고, 생명과 안전이 아니라 죽음의 위험을 선택하며, 아첨이 아니라 비판을,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도덕적 의무를 선택한다.”

파르헤지아를 행하는 사람을 파르헤지아스트라 한다. “파르헤지아스트는 생각을 말할 때 신실하며, 그의 의견은 진실이다. 그는 그가 참이라고 아는 것을 말한다.” 푸코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인에게서 파르헤지아스트의 완벽한 사례를 보았다. 그러나 그 시대의 정치인에게도 파르헤지아의 미덕은 요청됐다. 만약 파르헤지아스트가 정치영역에서 설 자리를 잃고 궤변가나 아첨꾼이 그 자리를 채운다면, 정치는 결국 껍데기만 남게 된다. 진실을 감추고 침묵 뒤에 숨어 위기를 피해 가는 것은 파르헤지아가 아니다.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 파르헤지아를 찾는 것은 연목구어인가.

고명섭 책·지성팀장 michael@hani.co.kr

 

http://www.hani.co.kr/popups/print.hani?ksn=224036

posted by namasca
2010. 12. 6. 16:30 Ethics

몇 달전 어떤 EBS강사가 군대는 살인 기술을 배우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뭐 그 때 그 강사에 대해 여기저기서 비난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저는 바로 뭐라고 얘기하지는 않았죠~  실상 보면 사람 죽이는 방법을 훈련하는 곳이니깐요...

 

 

 

그 때 뭐라고 얘기하지 않으면서 이제와서 다시 얘기하는 이유는 이종사촌때문입니다. 아직 군대를 갔다오지 않았는데 꼭 가야하는지 의문을 품더라구요... 특히 저 강사가 한 말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바로 '군대는 살인 기술을 배우는 집단이다'라는 말이죠... 그저 윽박지르기에는 그 녀석의 머리도 커졌고, 또 나름 생각한 게 있으니 군대에 대해 회의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네이트온으로 꽤나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뭐 실상은 제가 그 녀석에게 설교하는 수준이었죠... 제 말을 들어준 이종사촌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느낍니다.

 

 

적어도 여기 오는 분들은 군대의 필요성에 대해서 공감대를 형성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자게에 보면 군대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분들이 적지 않더라구요...그 이면엔 군대에 가기 싫다는 감정이 있다는 걸 부인하기 힘들겠구요... 자게에 쓸까 하다가 내용이 좀 무거워서 여기에 이종사촌에게 했던 얘기를 다시 풀어봅니다.

 

 

 

1. 국가란 정당한(또는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강제력(또는 폭력)을 독점한 곳입니다.

 

 

막스베버가 정리한 서양에서 말하는 국가의 성립배경입니다. 국가가 회사나 교회 또는 학교와 같은 조직과 가장 구별되는 특징은 바로 강제력(또는 폭력)의 사용에 대한 권리를 독점한다는 것입니다.

 

 

유럽의 역사를 보면 애초부터 국가가 폭력의 사용에 대한 권리를 독점적으로 부여받지 못했습니다. 폭력의 사용은 각 지방의 영주, 또는 교구장이 갖고 있어 이를 자의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지방의 경우는 그러했지만 도시의 경우는 또 달랐죠... 그곳에서는 깨어있는 시민들이 있어 국가나 영주 또는 교회의 자의적인 권력사용을 막았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커진 것이 바로 시민혁명이죠...

 

 

막스베버는 국가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피지배자는 지배집단이 주장하는 권위에 복종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베버가 말하는 정확한 국가의 정의는 '정당한(또는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강제력이라는 수단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관계'입니다. (베버가 말하는 국가에 대한 정의는 우리나라에서 좌파로 분류되는 분들이 말하는 국가에 대한 정의와 놀랄만큼 비슷합니다. 베버도 좌파라고 우길건지 참 궁금하요~ ㅡㅡ;;) 

 

 

그 권위에 복종하는 기제는 내적정당화와 외적 수단이 있습니다. 내적정당화의 근거는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 번째는 신성화된 관습의 권위입니다. 간단합니다. 오랫동안 내려온 것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베버는 가부장과 가신제의 권위가 행사하는 전통적인 지배체제라고 덧붙입니다. '지금, 여기'에도 이런 권위가 횡행하는 국가(또는 조직)가 있습니다.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어떤 곳인지 금방 짚어낼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개인의 천부적 자질인 카리스마적 권위입니다. 진정으로 민주정치(즉, 시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가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현실을 보면 한 국가의 권위는 대표자 한 명에게 집중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대통령에게 부여되고, 일본의 경우는 천황에게 부여됩니다. 베버는 이를 한 개인이 전하는 신의 계시, 그가 가진 영웅적 자질 또는 지도자적 자질에 대해 피지배자가 순전히 개인적으로 헌신하고 신뢰하는 것이라고 상술합니다. 저처럼 남의 말 잘 안듣는 불량시민은 대통령의 권위를 눈꼽만큼도 인정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람(그는 사람입니다)입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유형은 예언자, 선출된 전제군주, 그리고 국민투표에 의한 통치자입니다. 베버는 나중에 이 유형에 속하는 정치인이 정치를 천직으로 가진 사람이라고 얘기합니다.

 

 

 

세 번째는 합법성에 의한 지배입니다. 베버가 평생을 두고 탐구했던 '합리성'이 여기에 나옵니다. 합법적 규약의 타당성에 대한 믿음, 합리적으로 제정된 규칙이 정하는 객관적 권한의 타당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권위입니다. 이 때의 복종은 법규가 규정한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이뤄집니다. 여기에 속하는 유형은 근대적 관료입니다. 현대에서 말하는 법규란 민주적인 방식으로 제정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제정된 법규에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따라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자신들이 정했으니 마땅히 따라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뭐 정말로 그 법규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 여부는 좀 더 생각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내적정당화의 근거는 이렇지만 실제로 국가의 권위에 복종하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외적 수단입니다. 바로 공포와 희망, 그리고 이해관계입니다. 전쟁에 대한 공포, 경제위기에 대한 공포, 좀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희망이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게 만듭니다.

 

 

 

2. 국가가 독점하는 강제력(폭력)

 

 

다시 한 번 베버를 빌려옵니다. 베버는 국가가 독점하는 강제력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3이라는 숫자가 또 나오네요~ ^^;;) 그런데 이 강제력의 근거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 근거는 바로 베버가 말한 내적정당화의 근거 세 번째, 즉 합법성에 의한 지배입니다. 국가가 휘두르는 강제력이 합법성에 저촉된다면 시민은 이에 항거할 당연한 '권리'가 있습니다. 국가가 휘두르는 강제력을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하는 이유입니다.

 

 

첫 번째는 '경찰권'입니다. 법에 기초해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한 강제력입니다. 경찰이 동네 상인들에게 자리값을 받고, 업자들과 결탁해 사건을 무마하며, 또 룸살롱에서 지역 유지들과 어울린다면 이는 동네 조폭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경찰이 있을 바엔 차라리 지역민들이 스스로 자경단을 조직해서 지역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지키는 게 낫죠... 실제로 그렇게 하는 곳도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지역은 그렇게 한다고 들었습니다. 배트맨을 보면서 자경단의 의의를 생각할 수도 있죠... 그렇지만 그렇게 하기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갑니다. 그러기에 경찰에 이러한 권한을 위임한 것이죠...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많은 경찰들은 불철주야 애쓰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처벌권'입니다. 재판을 통해 유죄가 확정되면 국가는 피고인이게 벌금을 물리거나 징역을 살게함으로써 피고인의 신체를 구속할 독점적인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이 친구들에게 맞았다고 청계산에 데려가 심판을 하거나, 자기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한다고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패는 건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재벌은 결코 국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벌권은 오직 국가가 사용해야 그 정당성이 인정됩니다. 그런데 이런 처벌권이 민간으로 위임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신문을 보니깐 여주에 민간교도소가 생겼더라구요... BHL이 쓴 '아메리칸 버티고'를 보면 미국 민간교도소의 실태가 나옵니다. 그렇게 운영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은 '교전권'입니다. 이제야 군대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네요.. ^^;; 국가는 타국의 침략을 받을 경우 자국 영토를 방어할 권리를 독점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침략자에 대한 살상을 합법화한다는 것이죠... 침략자는 죽여도 살인죄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과 도쿄 전범재판에서 주로 다룬 논의가 이 교전권에 관한 것입니다. 두 재판은 나중에 이렇게 결론을 내렸죠... 나치독일과 일본제국은 합법성을 결여한 국가이다. 따라서 이들이 수행한 전쟁은 정당성이 없는 전쟁이다. 다른 말은 안 하겠습니다. 다만 국가의 교전권을 인정하기 위해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말하겠습니다.

 

 

 

3. 국가의 교전권을 수행하기 위한 집단, 군대

 

 

국가가 독점하는 강제력을 수행하기 위해선 이를 이행하기 위한 조직이 각각 필요합니다. 경찰권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경찰이, 처벌권을 수행하기 위해선 검찰과 법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교전권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합니다.

 

 

국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경찰과 검찰, 법원 그리고 군대의 필요성도 인정해야합니다. 또한 그들이 합법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면 그들의 권위도 인정해야합니다. 세계 시민들 모두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공존을 꿈꾸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면 어쩔 수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국가는 필요합니다.

 

 

우리나라는 징병제 국가입니다. 징병제가 낫다, 모병제가 낫다고 여기저기서 얘기합니다. 최근 인문서적으로는 특별하게 베스트셀러에 오른 '정의란 무엇인가'에 보면 징병제와 모병제에 관한 논의가 나옵니다. 미국의 경우를 들어서 얘기하는데, 우리나라가 계속 미국의 길을 뒤따르고 있다는 점을 본다면 미국의 현재가 우리의 미래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베트남전쟁의 경우 미국 내에서 반전운동이 뜨거웠습니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은 징병제국가였죠.... 뭐 빠질 수 있는 구멍이 많긴 했지만,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텍사스 깡촌의 농부 아들부터,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아들, 월가에서 엄청난 돈을 주무르는 금융가의 아들, 그리고 워싱턴 정가의 아들까지 무차별적으로 베트남에 가야했습니다. 상류층의 사람들도 적잖게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고 했습니다. 공화당의 메케인 의원도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고 했죠.... (그는 해군제독의 아들이었습니다)  이런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사지에서 전쟁의 참상을 보고 겪었습니다. 게다가 전쟁 개시 시점에 나타난 미군의 사기행각도 드러나게 되었죠...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2004년에 일어난 이라크 전쟁은 달랐습니다. 반전운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 때와 비교하면 미약했죠... 베트남전쟁만큼 협작과 무리수가 많았던 전쟁인데 말이죠.... 모병제 하에서 일어난 전쟁입니다. 많은 부유층과 상류층은 군대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미군에 자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저소득층에서 중간소득층인 사람들이라는 얘기입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경우 1956년 졸업생 750명 가운데 과반수인 450명이 졸업 후 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런데 2006년에는 졸업생 1108명 가운데 입대한 사람은 고작 아홉명에 그쳤습니다. 다른 일류대학이나 미국 도시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진다고 하더라구요...

 

 

상류층은 군대를 기피하고 있지만 슬프게도 전쟁을 시작할 권한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들입니다. 선전포고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의회 의원 가운데 자녀가 군에 입대한 경우는 2%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과연 이들에게 전쟁을 수행시킬 권한이 있는 것이 정의로울까요?? 이렇게 보니 우리나라는 징병제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모병제국가인 미국과 참 닮았네요...

 

 

 

4. 이 부분은 이종사촌에게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 교전권이 있나요?? 없습니다. 국가가 독점하는 강제력 중에 하나인 교전권은 현재 한미연합사령부에 있습니다. 바로 전시작전통제권이죠... 제가 뭐 딴 소리 할려고 이 얘길 꺼낸 게 결코 아닙니다. 당연히 우리가 갖고 있어야 할 권한인데 우리 현실을 이유로 근 40년 동안 남에게 쥐어주고 있습니다. 40 년이면 짧은 기간도 아니건만, 또 그 동안 우리가 주적으로 생각하는 북한보다 엄청나게 많은 돈을 가져갔건만 아직도 시기상조를 외칩니다. 시기상조는 참 무서운 상조회사네요~ ㅡㅡ;;

 

 

이런 당연한 얘기를 하는데도 이런 얘기를 하면 이적행위다, 빨갱이다, 라며 얘기하는데 정말 치가 떨립니다. 성향으로 보자면 저는 결코 국가우선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런 제가 이렇게까지 국가의 교전권과 군대의 중요성을 얘기합니다. 참 재밌네요~ ㅡㅡ;;

posted by namasca
2010. 12. 6. 16:28 Economy

http://media.daum.net/economic/others/view.html?cateid=1041&newsid=20101130121505280&p=ohmynews&RIGHT_COMM=R5&allComment=T&commentViewOption=true&cSortKey=rc

 

 

 

보통 여기에 기사를 링크할 때 저는 그 기사가 실린 언론사를 직접 링크 겁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 그 언론사에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더 드나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댓글이 많이 달리는 곳은 포털에 게재된 기사죠.... 오마이뉴스에서 이 기사를 봤을 때는 그냥 지나갔는데, 다음에 게재된 것엔 댓글이 꽤 달렸더라구요...

 

 

그 댓글들을 추천순으로 정렬하니깐 좀 놀랍더라구요... 사실 놀랄일이 아닐지도 모르죠...  어쩌면 이런 반응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사실일 수도 있구요....(제가 잘사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살고 있질 않아서 판단을 보류합니다) 잘 사는 사람들이 많은 동네는 조용하고 깨끗한 반면, 잘 못사는 사람들이 많은 동네는 시끄럽고 지저분하다.

 

 

 

춘추시대 제나라에 안영이라는 재상이 있었습니다. 중국 역사상 명재상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죠... 그런데 이 사람이 사는 곳이 좀 누추한 곳이었나 봅니다. 일반 백성들이 많이 살고 있는 시장 부근에 살고 있었는데,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곳이었다고 하더라구요.... 이를 안타깝게 여긴 왕은 안영에게 좋은 곳에 집을 지어줄 테니깐 여기에 가서 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안영은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백성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이들의 얘기를 쉽게 들을 수 있고, 시장이 가까워 물건을 구하기가 쉽다며 거절을 하죠...

 

 

그러자 왕이 이렇게 묻습니다. "그대가 시장에 가깝게 살고 있다는데, 그러면 지금 시장에서 비싼 건 무엇이고 싼 건 무엇인지 말씀해 주게나" 그러자 안영이 거침없이 대답합니다. "목발이 비싸고 신발은 쌉니다" 그 당시에 형벌로 발을 자르는 벌이 있었다고 합니다. 목발이 비싸고 신발이 싸다는 말은 가혹한 형벌로 발을 잘린 사람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안영의 대답의 의도를 알아챈 왕은 다음 날로 가혹한 형벌을 줄였다고 합니다. 멋진 재상과 멋진 왕의 만남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례는 역사에서 극히 드물죠.... 드물기에 역사에 남고 칭송 받는 것이구요.... 사실 부자들이 끼리끼리 살려고 하는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동양 · 서양 나눌 일이 아닙니다. 저기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야 처음 생겨날 때부터 부자들이 모여 살았으니 저렇게 말하는 거에 뭐라 하진 않겠습니다. 저기에 제가 살만한 20평 대 소형 아파트를 짓는다고 해도 거기 가서 살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네요~ 얼마나 눈칫밥을 먹으면서 살아야할지.... (ㅡㅡ;;)

 

 

근데 문제는 서울 시내 곳곳이 이런 중·상류층 주거지로 바뀌는 것이죠... 대표적인 사업이 바로 뉴타운이구요... 제가 살고 있는 창동도 뉴타운으로 전에 꽤나 시끌벅적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국회의원도 바뀌었구요...;;

 

 


 

빈민가와 낙후지역의 주거지가 재개발을 통해 중·상류층의 주거지 또는 상업지구로 바뀌는 현상을 '젠트리피케이션(gentirfication)'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길음뉴타운입니다. 서울 시내 뉴타운 중에서 그나마 제가 잘 알고 있는 곳이기도 하구요.... 뉴타운 사업이 시작되기 전의 길음동 지역은 달동네였습니다. 근처 미아동이나 돈암동에도 저밀도주택이 몰려있긴 했지만 길음동만큼 낙후되진 않았죠... 지금은 거의 사업이 마무리돼서 예전 모습을 찾아보긴 힘들지만, 길음역 7번출구로 나와서 길음시장 부근을 둘러보신다면 예전 모습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겁니다.

 

 

제가 미아삼거리에 있는 영훈고등학교를 나왔는데, 학교에서 보면 길음동 달동네가 한 눈에 들어왔죠....그 때는 뭐 공부하기 바뻤고, 길목에 북공고가 있어서(;;) 감히 신세계백화점(지금은 이마트 미아점) 위로 올라가질 못했습니다. 여기에 처음 가본 건 대학에 들어와서입니다. 동아리에서 야학활동을 했었는데, 길음동 달동네에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신입생이고 해서 선배들이 하는 거 보조를 했죠.... 프린트하고, 프린트 한거 나르고, 물 같은거 갖다 놓고, 청소하는 등 ;;; 지금도 그렇게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그 때 야학에서 주로 했던 거는 검정고시 준비였습니다. 대부분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한 분들이라 학력에 대해 부끄럼이 있는 분들이죠...저희 어머니도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하셨던터라 활동하면서 어머니 생각이 나더라구요... (그런데 어머니는 초등학교만 나온 걸 별로 부끄러워 하지 않으신다능~;;;)

 

 

 

별로 오래하진 못했습니다. 1학년 2학기때부터 2학년 1학기 때까지 한 달에 한 번 꼴로 갔으니깐요.....;;; 한 달에 한 번 겨우 얼굴을 비추는데도 그 분들은 누군지 알아봐주시고 참 고마워 하시더라구요... 오히려 제가 더 미안했습니다. 2학년 때는 제가 수학을 맡아서 강의를 맡았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남을 가르쳐 본다는 게 처음하는 일인데다, 8월에 시험이 있는터라 신경이 더 쓰이더라구요...;;; 공부는 그분들이 하지만 저도 신경이 쓰였습니다. 군대를 9월에 가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채 입대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모두 통과하셨다고 해서 매우 기뻤습니다.

 

 

그런데 길음동 뉴타운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가 바로 2002년 10월입니다. 그 때 길음뉴타운 개발계획이 수립되었고, 이후 주민 설명회, 보상계획이 이뤄진 후 2년 후인 2004년 3월에 첫 삽을 뜨게 됩니다. 그 동안 군복무 중이라 또 거기에 대한 관심이 뜸해져서 잊고 있었습니다. 제대 후에는 눈이 항상 높은 곳만 향하게 되더라구요... 야학활동 같은 사회활동보다는 자신을 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렇게 그곳을 잊어갔는데, 이상하게 이곳과 또 엮이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동네 친구인데 길음 뉴타운으로 이사를 갔다고 했습니다. 아.... 그곳??  예전 생각도 나고 또 그곳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그 친구 집에 가보았습니다. 아직 정비되지 않은 곳도 있었고, 공사 중인 곳도 있었는데 고층 아파트가 산위까지 주욱 늘어서 있더라구요.... 친구 집은 그 고층 아파트 숲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했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니 강북지역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야학에 다니면서 봤던 풍경이었지만 느낌은 사뭇 달랐습니다. 친구 말로는 원래 여기에 살던 사람들은 이곳 아파트에서 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집값도 집값이지만 매달 내는 관리비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사실 달동네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죄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제 기준에서 그렇습니다) 그분들 중에는 시내에 가게를 갖고 있는 분도 계셨으니깐요...  또 자기 집을 갖고 있는 분들은 길음 뉴타운에 들어갈만한 보상은 받진 못했지만 적어도 상계동이나 또는 남양주에 괜찮은 아파트를 가질 정도로 보상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문제는 세입자들이었죠... 여기저기 얘기는 많이 나왔지만 파편적입니다. 사실 그 분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온 곳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경향에서 기획기사로 이 분들의 생활을 추적한 적이 있었는데 어떤 분은 공주까지 내려갔다고 하더라구요... 어쨌든 뿔뿔이 흩어졌죠.... 그리고 그 자리에, 서울시에서 전망이 가장 좋다고도 할 수 있는 그곳에, 중·상류층이 몰려 살고 있습니다. 그 곳에는 지금 10년 전과는 다른 문화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곳곳에 영어유치원이 생기고 있고, 고급 음식점이며 술집이 영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임대료만 웬만한 시내 역세권 수준인 200만원이라고 하더라구요...;;; 그곳에 국제중학교가 생긴다는 것은 아마 우연이 아닐겁니다. 이런 곳이 서울 시내 곳곳에 생기고 있습니다.

posted by namas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