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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Ecology)와 경제(Economics) 그리고 윤리(Ethics)가 하나가 되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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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ce

2013. 3. 3. 13:15 Miscellany
이 소설의 주제는

민주정과 전제정....

수식어를 덧붙이자면 (비효율적인) 민주정과 (효율적인) 전제정.... 중 어떤 것이 정답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각자 생각해보시라....
posted by namasca
2010. 12. 6. 16:25 Miscellany

 

 

길게 쓰니깐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더라구요.... ^^;; 그래서 이번엔 짧게 쓸려구요..;;

 

 

 

'풍요롭다'는 게 뭘까요??

 

 

돈이 많은 것? 시간이 많은 것? 친구가 많은 것? ^^;;

 

 

저는 시끌벅적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저마다 수다를 떨면서 시끌시끌하게 지내는 것!! 이게 바로 풍요로움이 아닐까요?? 가장 시끌벅적한 공간이 어딜까요?? ㅎㅎ 바로 동네시장입니다. 배추, 파, 고구마, 감자 같은 야채와 사과, 배, 귤, 바나나 같은 과일을 늘어놓고 '자자... 오늘 쌉니다 싸요~ 방금 새벽에 들어온 무라구요~' 하면서 손님들 끌어모으는 야채가게 아저씨들, 팔딱팔딱 뛰는 미꾸리와 물좋은 고등어가 진열돼있는 생선가게, 날이면 날마다 오는 뻥튀기 할아버지, 여기저기 몰려다니면서 구경하는 아이들 등등... 대형마트나 백화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시끌벅적함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시끄럽습니다. 애들이 참 많이 나오거든요.... 그리고 가난한 이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행복해 보입니다. 음악과 더불어 살고 있거든요...

 

 

음악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노래를 부를 수도 있고, 춤을 출 수 있습니다. 시몬볼리바르유스오케스트라의 공연을 찾아 보세요...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시끌벅적함의 생명력이 느껴질 겁니다. 연주도 매우 훌륭하구요...

 

 

꼭 유명한 음악가를 배출해서 '엘시스테마'가 높이 평가받는 것은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면 마약운반상이나 길거리 싸움에 휘말릴 아이들을 음악의 세계로 이끌어서도 아닙니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방편으로 음악을 이용했다는 데에 저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두 명 입니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아이들... 다른 하나는 '엘시스테마'의 창시자인 호세 아브레우박사입니다. 아브레우 박사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엘 시스테마'의 물적 토대를 갖추기 위해 하루 20시간 이상의 노동을 감내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수화합창단 아이들과 즐겁게 노는 모습도 나오죠...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    - 에릭 홉스봄 -


 

 

아브레우 박사가 세상을 바꾸기 위한 무기로 택한 건 바로 '음악'입니다. 그가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장관까지 한 '경제'가 아닌 바로 '음악'입니다. 베네주엘라가 더 좋은 곳으로 바뀌길 먼 곳에서 응원합니다. 더불어 우리도 우리가 밟고 있는 이 곳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각자 무기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무기는 다양할 수록 더 좋구요~ ^^;;

 

 

 

(덧붙이기) 지금 이 영화가 상영되는 곳은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와 광화문 '시네큐브'라고 합니다. ^^;; 좋은 영화는 제 값을 주고 봐야죠....

posted by namasca
2010. 12. 6. 16:13 Miscellany

 

어쩌면 우리 서로 다른 게 나을지 몰라
조금씩 서로 닮아가는 게 좋을지 몰라
있잖아 난 불완전 해서 사실 있잖아 불안해서 그래
난 있잖아 너 밖에 없어서 내겐 있잖아 Only you

똑같은 맘 똑같은 맘 너도 나와 똑같은 맘
Only for you, Only for me, Only for us
똑같은 맘 (똑같은 맘) 똑같은 맘 (똑같은 맘)
처음부터 똑같은 맘 절대 변할 수 없어 Only for us

아직도 우린 가야 할 길이 멀지도 몰라
조금씩 서로 맞춰가는 게 좋을지 몰라
있잖아 난 불완전 해서 사실 있잖아 불안해서 그래
난 있잖아 너 밖에 없어서 내겐 있잖아 Only you

똑같은 맘 똑같은 맘 너도 나와 똑같은 맘
Only for you, Only for me, Only for us
똑같은 맘 (똑같은 맘) 똑같은 맘 (똑같은 맘)
처음부터 똑같은 맘 절대 변할 수 없어 Only for us

똑같은 맘 (똑같은 맘) 똑같은 맘 (똑같은 맘)
너도 나와 똑같은 맘 Only for you, Only for me, Only for us
똑같은 맘 (똑같은 맘) 똑같은 맘 (똑같은 맘)




처음부터 똑같은 맘 절대 변할 수 없어
Only for us (Only for us), Only for us




=========================================================================



사실 이 곡은 아이뮤지션이라는 핸드폰게임 프로모션용으로 제작된 곡입니다. 나중에 2집에 수록되긴 했는데, 디지털싱글로 원곡을 들어보면 가운데 '아이뮤지션'이라는 배경음이 들어가죠~ ㅋㅋ



아이돌그룹의 노래는 사실 거기서 거기입니다. 들어보면 무슨 틀이 있는 거마냥 비슷비슷하죠.... 이 노래도 그렇습니다. 카라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실겁니다. 한재호, 김승수 씨의 작업입니다. 카라의 대표적인 곡을 작곡하신 분들이죠.... ^^;; 다른 가수들 노래는 잘 모르겠고 카라 노래만큼은 다 전개가 비슷비슷합니다.



이 노래도 프리티걸이나 허니, 또는 최근에 나온 'we're with you'와 매우 비슷한 곡입니다. 전개가 말이죠... 처음 부분에 승연이하고 규리가 맡고 나중에 니콜이 절정으로 이끌고 절정 부분엔 모두가 합창하는 구조~!! 마땅한 메인보컬이 없는 카라로선 이런 식의 전개가 아마 최선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rock you' 때보단 가창력이 나아졌다는 평(?)이지만 다른 걸그룹에 비하면 메인보컬이 아쉬운 카라입니다.



뭐 가요를 많이 듣지도 않고, 음악도 잘 모르기 때문에 음악적인 부분은 여기까지만 말하겠습니다. 아이돌그룹의 노래가 비판을 많이 받고 있는데 그 이유 중에 하나로 거론되는 게 바로 지나치게 단순하고 노골적인 가사때문이죠....;; 전에 샤이니의 '링딩동'하고 무한궤도의 '그대에게'의 가사를 비교한 게시물을 본 적 있습니다. 참....;; 그렇더라구요...;;



서양에서 말하는 Music의 어원을 따져봐도, 또 동양에서 말하는 '樂'의 기원을 따라가면 '음악'이란 '음'으로만 이뤄진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동양의 개념으로 말씀드리자면 詩, 音, 舞가 하나로 어우러진 것을 樂이라고 할 수 있죠... 이를 현대에 적용한다면 詩는 가사, 音은 멜로디, 舞는 무대위의 퍼포먼스(단순히 춤이라고 지칭하기엔 그 개념이 너무 좁을 것 같습니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하고 노골적인 가사는 결코 詩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나오는 아이돌그룹 노래의 가사는 결코 詩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음악을 이루는 3요소 중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죠...;; 작곡가는 그렇다치고, 한 노래에서 작사가를 굳이 명시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노래에서 가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죠...;;



얘기가 좀 뒤죽박죽이 되었는데(ㅎㅎ) 어쨌든 요즘 나오는 단순하고 노골적인 가사는 참 보기 안 좋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어떤가요?? 사실 카라의 많은 곡 중에서 굳이 이 곡을 소개하는 이유는 가사 때문이거든요... ^^;; 이 곡도 보면 반복되는 부분이 많고 좀 단순한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 단순하다고 보기엔 무언가 생각하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거든요.... ^^;;



어쩌면 우리 서로 다른 게 나을지 몰라               ①
조금씩 서로 닮아가는 게 좋을지 몰라




이 부분과



아직도 우린 가야 할 길이 멀지도 몰라               ②
조금씩 서로 맞춰가는 게 좋을지 몰라




요 부분입니다. ^^;; 그리고 후렴구이자 제목인



똑같은 맘                                                    ③




이 부분입니다.  먼저 ①입니다. 이 부분은 이 곡의 시작이죠... 시작부분부터 긴장을 줍니다. '어쩌면 우리 서로 다른 게 나을지 몰라' ......  서로 닮은 부분이 있으면 쉽게 친해질 수 있습니다.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는 가족도 보면 그 친함의 근원은 '닮음'에 있다고 볼 수 있죠....그런데 '닮음'만 강조해서는 결코 '친함'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친함'을 넘어선다는 게 바로 '사랑'이죠~ ^^;; 이 '친함'을 넘어서는 데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닮음'을 넘어서 아예 '같음'을 지향하거나 또는 '다름'을 인정하고 '和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서로 같아진다'라는 건 무엇을 말할까요?? 뭐 겉모습이 같아질 수도 있고(금슬이 좋은 부부는 세월이 지나면 서로 닮아간다고 하죠~ ^^;;) 서로 쓰는 말이 같아질 수도 있습니다. 쓰는 말이 같아지면 생각하는 바가 같아지고, 결국엔 서로의 뜻이 같아질 수 있죠.... 뭐 반대로 생각해도 상관없습니다. ㅎㅎ 서로의 뜻이 같아지면 서로 생각하는 바가 같아지며, 나중엔 말이 같아진다 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생각으로 몰아가기엔 결론이 안나는 얘기죠... ㅎㅎ



저는 '같음'을 추구하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불가능한 것을 억지로 강요한다면 이는 바로 '폭력'이죠...;;; 모든 인간은 다릅니다. 생김새는 물론이고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모두 각자 개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개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같게 만들려는 시도가 있죠... 자의에 의하든 타의에 의하든 말이죠... 생김새를 같게 만드는 건 어떤 이상형을 정해놓고 여기에 맞추는 행위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뭐 '성형수술'이죠....;; 병원에 가서 '김태희처럼 해주세요'라든가 아니면 좀더 명확하게 '한가인의 코처럼 만들어주세요'라며 수술을 하고 있죠... 그런데 어쩌죠?? 그렇게 고쳐봐야 김태희나 한가인처럼 보이지 않는데 ;;; 당연한 결과죠... 김태희의 눈, 코, 입이 예뻐 보이는 건 그것들이 김태희라는 '한' 인물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고, 한가인의 코가 예뻐 보이는 건 그게 한가인이라는 '하나'의 인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죠.... 아무리 용을 써봐도 어색한 게 당연합니다. 다른 사람인데 억지로 같게 할 순 없는 노릇이죠...



뭐 생김새를 같게 하는 건 작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더 위험한 건 생각과 말을 같게 만드는 일입니다. 생김새를 같게 만드는 건 거의 자신의 뜻으로 이뤄진다고 볼 수 있다면, 생각이나 말을 같게 만드는 건 '자의'라기 보다는 '타의'에 의해 강요되는 면이 더 큽니다. 다시 말하면 이 과정은 폭력적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큽니다. 이 부분은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결코 쓰기 귀찮아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전에 '감상게시판'에 이를 억지로 강요하는 대표적인 사례인 파시즘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파시즘이 단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문구일 뿐일까요?? 각자 생각해볼 일입니다.




앞에서 저는 '친함'을 넘어서기 위해선 두 갈래의 길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길은 불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남은 길은 하나네요.... ㅎㅎ '다름'을 인정하고 '和함'을 추구하는 길입니다. 이 말을 하려고 이렇게 길게도 늘어놨네요~ ㅎㅎ



칸트는 이성의 '구성적' 사용과 '규제적' 사용을 구분했습니다. 이성의 '구성적' 사용은 이성에 기초해 사회를 급격하게 바꾸는 걸 말합니다. 말하자면 어떠한 이념으로 현실을 '구성'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죠... 역사를 보면 이런 사례가 참 많습니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자코뱅당의 공포정치, 러시아혁명 이후 스탈린의 철권통치, 그리고 중국의 문화혁명까지.....;;; 그들이 말하는 이념은 정의롭고 아름다웠지만 문제는 이를 급격하게 또 폭력적으로 이루려 했다는 점이죠...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성의 '규제적' 사용도 이성에 기초에 사회를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점이라면 이성의 사용에 규제를 가한다는 점이죠...다시 말하면 현실에 맞춘다는 말입니다. 이성의 '규제적' 사용에도 이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념으로 현실을 '구성'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시 이념에 기초에 현실을 '반성'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현실을 바꾸기 위해 포기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현실과 이념의 간극이 한 없이 멀게만 느껴져도 이를 가깝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것입니다. 저기 위에 가사에도 나오네요~ 어떠한 이념을 '똑같은 맘'이라고 본다면 이를 규제적으로 이용하는 걸 ②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ㅎㅎ 너무 끼워맞추기인가요??)




뭐 아이돌그룹노래 하나 들으면서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는 것 같네요~ ㅎㅎ 그냥 문자 그대로 이해해도 좋습니다. 전 그냥 제 생각을 말씀드렸을 뿐이니깐요.... ^^;;

posted by namasca
2010. 12. 6. 16:12 Miscellany

520억 들인 ‘노들섬 오페라하우스’ 좌초 위기

 

 

 

전 클래식을 매우 좋아합니다. 요즘 듣는 음악이 딱 두 가지인데 하나는 카라 노래, 하나는 클래식입니다. 전에는 힙합이나 락도 많이 들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귀가 불편한 음악은 별로더라구요....(뭐 더 큰 이유는 찾아보기 귀찮아서구요~;;)

 

 

쓸데없는 말은 이 정도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갈께요~ 현재 국립오페라단하고 국립오페라합창단은 전용극장이 없습니다. 지금 예술의 전당을 전용극장처럼 쓰고 있는데 그곳엔 국립오페라단만 있는 게 아니라 국립발레단, 코리아심포니가 같이 쓰고 있습니다. 웬만한 유명 오페라단은 전용극장이 있죠... 국립오페라단의 숙원사업이 바로 전용극장 설립입니다.

 

 

전용극장이 필요하다고 아우성 치는 곳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서울시교향악단(언제부터 자기들이 SPO라고 얘기하고 다니더라구요 ;; SPO는 서울필하모닉오케스타라의 준말입니다)입니다. 서울시향은 지금 세종문화회관에 얹혀지내는 중입니다. 원래 서울시향은 시립이었을 때 운영권을 세종문화회관이 갖고 있다가 2005년에 서울시향이 재단법인으로 바뀌면서 서울시향은 독립적인 조직이 되었습니다. (뭐 아직도 시에서 운영에 관해 이것저것 참견하는 게 많다고 합니다 ;;) 어쨌든 둘이 편한 관계는 아니라고 하더라구요...;;

 

 

 

서울시향을 재단법인으로 바꾸면서 서울시에서 약속해 준게 바로 전용극장 설립이었습니다. 바로 '노들섬 오페라하우스'입니다. 노들섬은 한강대교 중간에 있는 섬으로 전에는 맹꽁이가 지내고 새들이 지내던 자연섬이었습니다. 그러다 용산재개발과 맞물리면서 노들섬에도 개발 압력이 들어오게 되었죠.... 오세훈 시장의 '한강르네상스'(어째서 여기에 '르네상스'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지 ;;)계획에 노들섬 오페라하우스 건립이 들어가게 된 배경입니다.

 

 

건설경기가 좋았을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죠.... 문제는 2008년 금융위기로 건설경기가 위축되고 나서부터입니다. 벌써 용산역재개발은 지금 하냐 마냐 난리죠...;; 그 여파가 노들섬 오페라하우스까지 미쳤습니다. 위에 링크된 기사는 벌써 여기에 들어간 비용이 520억원인데 지금 이 사업이 중단될 위기라고 하고 있죠...;;;

 

 

용산역 재개발이야 민간사업이기에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아 중단되었습니다. 이 사업은 관에서 하는 사업입니다. 사실 체육시설이나 문화예술시설은 수익성만 따져서 짓는 게 아니죠.... 시민들의 체육시설에 대한 요구, 문화생활에 대한 요구, 또는 정책적 필요성, 시의 랜드마크 조성 등 여러가지를 따져서 만듭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게 좀 바뀝니다.

 

 

시가 지어놓고 민간에 위탁해서 관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건 바로 야구장같은 체육시설물입니다. 지금 잠실구장, 문학구장, 사직구장은 시가 각 구단에 위탁운영하도록 계약을 맺었습니다. 미국 같은 곳은 장기로 20~60년까지 임대운영을 하는 경우도 있죠... 아직 우리나라는 그렇게까지는 못갔지만 조만간 그렇게 될 거 같습니다. 3~4년 단기든, 20~60년 장기든간에 위탁운영이나 임대운영은 그 시설물의 소유권은 시가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공공시설물입니다.  (일단 통용되는 '공공(公共)'이라는 개념이 官에 연계된 거라 공공시설물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공공'의 개념을 좀 더 넓게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면 시가 아예 소유권의 형태를 주식회사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재단을 설립해서 이 소유권을 주식의 형태로 쪼개는 거죠... 뭐 어디처럼 51%만 갖고 있으면 '그게 내꺼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럴 경우 그 시설물의 이용이 공공의 논리를 따라가기보다는 수익의 논리를 따라갈 위험이 크다는 겁니다. 특히 그 시설물이 독점적인 위상을 갖고 있을 경우에 말이죠...;;

 

 

노들섬 오페라하우스가 원래는 재단설립을 해서 운영하려고 했나봅니다. 국립오페라단은 잘 모르겠고, 적어도 서울시향하고 묶어서 재단설립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섣불리 제가 예상하진 못하겠지만, 비슷한 외국 사례는 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입장료가 비싸다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전철을 밟을까요?? 아니면 시민들에게 문턱을 낮추기 위해 정책적으로 입장료를 조정하는 독일의 경우를 따를까요??  뭐 이런 사치스러운 고민도 짓고 나서야 할텐데 지금은 아예 만들지도 못한터라~ ;;

posted by namasca
2010. 12. 6. 16:09 Miscellany

어제(8/27) 어떤 분이 자게에 '붉은 돼지를 동경한다는 게시물을 올리셨더라구요~ ^^;; 저도 재밌게 본 에니메이션이어서 방금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미야자키 하야오를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입학 하고 나서입니다. 1학년 때(1998) 친구 중에 일본 에니메이션 매니아가 있었는데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더라구요...;; 그 때는 아직 정식으로 일본문화가 정식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관심있는 사람들은 어둠의 경로를 통해 일본 에니메이션, 음악, 영화를 접했죠... 그 친구도 마찬가지였구요.... ^^;;




처음에는 좀 반감이 있었는데, 그 친구를 따라 원령공주를 보게되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문화충격'이었죠... 원령공주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얘기하겠습니다. ^^;; 어쨌든 이 게시물의 주제는 '붉은 돼지'니깐요...



여기에 올리는 두 번째 게시물인데 이번에도 처음은 좀 재미없는 얘기로 시작할까 합니다. 영화얘기부터 보고 싶으신 분은 4.부터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  이번에도 역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썼는데 써놓고 보니깐 쓸모 없는 얘기만 한 거 같네요~ ㅎㅎ




1.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은 1930년대 이탈리아입니다



세계사를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이라면 조금만 봐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 그런데 굳이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미야자키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이 에니메이션은 시대배경을 명확하게 드러냈다는 점이죠... 미야자키 작품의 특징이라면 불분명한 시대와 장소를 배경으로 보편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점입니다. 이전 작품인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마녀배달부 키키'와 비교해보면 그렇죠...(토토로는 일부러 제외~ ^^;;) 굳이 이 작품들의 공통점을 찾자면 배경이 유럽(?, 뭐 말은 일본어를 하지만 ;;)입니다.



어쨌든 유럽마니아(?)답게 이 에니메이션의 배경은 이탈리아, 그것도 눈부신 지중해 중에서도 아드리아해입니다.



이탈리아는 지역색이 강한 국가로 유명합니다. 19세기 중반에 통일되기 전까지 약 600여년에 걸쳐 각 도시와 지방이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 이탈리아를 크게 나누면 북동부 이탈리아, 북서부 이탈리아, 그리고 남부 이탈리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북동부 이탈리아의 중요 도시로는 볼로냐와 베네치아가 있는데, 두 도시 모두 오랫동안 안정적인 민주정이 이뤄진 도시국가입니다. 이 곳의 시민들은 정치의식이 높기로 유명한 곳이고 또 자유에 대한 의식이 강한 곳입니다. 뭐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몇몇 외신을 통해 들은 지금의 베네치아는 외부인이 그곳의 땅값을 엄청 올려놔서 지역주민들이 하나 둘 떠나가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어쨌든 이탈리아 동부 지역은 시민들의 자유와 자치에 대한 요구가 강한 지역입니다. 이 점은 오랫동안 왕국을 유지해왔던 남부 이탈리아, 그리고 강대국(프랑스, 오스트리아)에 둘러싸여 끊임없이 침략을 받았던 북서부 이탈리아와 비교되는 부분입니다. 두 곳 모두 왕정이든 공화정이든 중앙의 강력한 통치가 이뤄진 곳이거든요...



그렇게 지역색이 강하던 이탈리아지만 하나의 국가를 향한 열망은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이는 베르디의 오페라를 보면 잘 알 수 있죠...이탈리아는 1861년 통일을 이룹니다.(자세한 것은 위키백과참조 ^^;;) 이 때까지 북동부 지역은 통일에서 제외되었지만 1차대전이 지나면서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됩니다.





이탈리아 왕국은 북동부지역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했습니다. 이후 1차대전이 시작된 이후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에 맞서 연합국 측에 붙었는데 전쟁은 연합국 측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에 대한 전리품으로 이탈리아는 아드리아해 동부연안까지 획득하게 되죠...



하지만 전쟁이 이탈리아에 땅만 가져다 준게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는 통일과정, 그리고 1차대전을 겪으면서 국채를 과다 발행했는데 이게 나중에 이탈리아에 재정위기를 가져와 이탈리아 경제를 악화시키는 주범이 됩니다. 경제가 악화되자 안 그래도 불안했던 이탈리아 사회는 더욱 불안하게 되죠... 이 틈을 타서 이탈리아 각지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게 됩니다. 북부 공업지대에서는 노동자들이 단결하게 되었고, 남부 농민들도 토지배분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을 두려워하던 이탈리아의 기득권자들은 그 때까지 반체제 정당으로 알려진 파시스트들을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이를 '트라스포르미스모(trasformismo)'라고 하는데, 이는 이탈리아 특유의 정치 상황에서 비롯된 전략입니다. 이탈리아는 영국처럼 강력한 양당이 존재해 두 당이 번갈아가면서 정부를 구성하지 못했습니다. 항상 군소정당이 난립했기 때문에 연립정부 구성이 필수적이었는데, 다수당은 연립정부를 구성하면서 원외 정당 중 몇 곳을 제도권으로 끌여들였습니다. 이는 군소정당들을 정치적으로 길들여서 정권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전략입니다.



그 때 까지 무솔리니는 보잘 것 없는 정치인이었습니다. 무솔리니가 주로 했던 일은 '검은셔츠단'을 조직해 사회주의자들의 파업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공적인 활동이 아닌 사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자유주의 성향의 정부는 파업을 하든 말든 방임하는 편이었는데, 지방의 상공업자들과 지주들은 이런 정부의 행동에 불만이 컸습니다. 이 간격을 무솔리니는 파고든 것입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건 무솔리니 일파의 파업 진압은 단지 폭력으로만 이뤄진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주와 상공업자들은 파업을 진압하도록 파시스트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땅이 필요했던 소작농과 질서를 원했던 노동자들도 파시스트들의 행동에 동조했습니다. 게다가 현지 경찰 · 군 · 지방의회 의원까지 파시스트들을 지원했습니다. 재산권을 보호하지 못하고 질서를 유지하지 못한 정부의 실패를 파시스트들이 폭력과 (침묵하는 사람들의)묵인을 통해 극복해나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솔리니는 중앙정치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무솔리니를 불러들인 우파들은 장관자리 하나 주면 무솔리니가 만족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야심가였습니다. 이듬해 무솔리니는 일명 '로마진군'을 감행, 일종의 친위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총리에 오르게 되죠... 이후 그는 강력한 통치권을 휘두르면서 경제재건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이상 '붉은 돼지'의 시대적 배경입니다.




2. 인간을 위한 기계? 기계를 위한 인간?



전에 밀리터리 포럼에 이런 게시물을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http://www.toshare.kr/?document_srl=55933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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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전투기를 조립하는 장면입니다. 알아보니깐 원래 전투기는 손으로 조립하더라구요...;;; 기계로 하려면 대량생산을 해야하는데 대량생산을 할만큼 수요가 있지 않아 부품을 만들어 사람 손으로 조립한다고 합니다.



'붉은 돼지'에도 이런 장면이 있죠.... 주인공이 새로운 전투정을 만들기 위해 밀라노의 한 장인을 찾아갔는데 전투정 설계부터 조립까지 모두 여자의 손으로 하죠.... 저 위 그림도 보니깐 여자들이 조립에 참가하더라구요~ ^^;;



눈여겨 보셨을지 모르겠는데 이 전투정이 조립되면서 군용전투정이 나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2차대전 전에 전투기는 공장에서 대량생산됐다고 합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군대에 있어 중요한 건 기술력보다는 수적 우위 확보였죠.... 공장을 통한 군수물품이 대량생산되었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 대량생산에는 또 다른 목적도 있죠... 바로 실업문제 해결입니다. 1930년대 대공황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게 제시되는 것이 생산성의 확대를 소비가 뒷받침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이 이뤄지지만 대중들의 소비능력이 이를 따라가지 못해 재고가 쌓이게 되었고, 돈이 돌지 못해서 공황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돈이 돌지 못하니 기업은 버티지를 못하고 사람들을 해고했고, 기업마다 사람들을 해고한 탓에 실업자는 더욱 늘어나게 되었죠... 실업자가 늘어나게 되자 대중들의 구매력은 더욱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를 타개하기 위해 큰 정부가 나타나게 되었죠... 정부가 빚을 내서 공공사업을 일으키고, 재고품을 소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 요인일지도 모르겠는데) 각국은 전쟁준비를 하면서 군수물품을 차곡차곡 쌓아놓습니다. 거대한 전쟁이 아니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런 흉기가 쌓인 것입니다. 어쨌든 이 방법은 실업난을 해결했습니다. 거대한 기계를 놀리지 않고 돌아가게 했으며 사람들을 일하게 만들었고, 중요한 건 정부가 낸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점이죠... 정부는 빚을 내는 한편 또 돈을 마구 찍어냈으니깐요...;; 어쨌든 물건이 계속 만들어져서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엄청난 생산이 필요했을까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인간이 편리하자고 또 편해지자고 만들어진 기계가 오히려 인간에게 일거리를 만들어주는 형국이죠...;;



뭐 이 에니메이션에는 그런 얘기까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 손으로 만들어지는 비행정과 이 비행정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기계가 필요에 의해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들어지고, 이 기계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자연과 멋진 곡예를 보여줄 따름입니다. 뭐 그 아름다운 장면과 곡예가 꼭 필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ㅎㅎ 그런데 적어도 파괴를 위한 기계보다는 훨씬 더 가치있어 보입니다.




3. 나라를 어지럽히는 유가와 협객



한비자는 나라를 어지럽히는 다섯가지 부류[五蠹之類]를 제시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척결해야할 자들을 유(儒)와 협(俠)이라고 역설합니다. 그 목적은 바로 일통천하(一統天下)입니다. 유는 말[文]으로 나라를 어지럽히고 협은 싸움질[武]로 나라를 어지럽히기에 이들을 막지 못하면 혼란을 다 잡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는 철저하게 위정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관점입니다. 유와 협은 나름의 신조를 갖고 행동했으니깐요~ 뒤집어 얘기하면 그들만의 행동강령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유와 협으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붉은 돼지'의 배경은 이탈리아지만 만든 사람은 분명 일본인입니다. (ㅎㅎ 너무도 당연한 말을 ;;) 일반적으로 일본은 유교문화권에 속한다고 분류하지 않지만 분명 유교의 영향이 미쳤음을 부정하긴 힘듭니다.

 

 

'붉은 돼지'에서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포르코 로소와 공적(하늘의 해적)들을 협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요?? 제가 길게 설명하기 보다는 협의 원형으로 불리는 한 자객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마지막 부분은 열전입니다. 열전은 천자(본기)나 제후(세가)로 기록되지 않은 역사 속 주요 인물들을 소개하는 곳이죠... '사기'의 진수라고 불리는 부분입니다. 그 진수 중의 진수로 일컬어지는 부분이 바로 '자객열전'입니다. 여러 자객들이 설명 되는데 가장 첫번째 나오는 '예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터넷은 너무 좋네요~ ^^;; 타이핑하기 전에 혹시나 하고 찾아봤는데 역시나 벌써 올리신 분이 있습니다. 출처는 http://tong.nate.com/gil779/47141191 입니다)

 

 


 

예양의 맹목적인 충심('忠'이라는 관념은 원래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는 말이지만 나중에는 어떤 대상을 향한 곧은 마음으로 바뀌었죠...;;)이 감동적이면서 또 조금은 씁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이 이야기를 매우 좋아한다고 하더라구요~

 

 

예양과 포르코(그리고 공적들)의 비교는 4로 넘길께요~ ^^;;

 

 

 

4. 이제 드디어 영화이야기를......;;;

 

 

 

처음부터 읽으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ㅠㅠ 짧게짧게 얘기하려고 했는데 쓰다보니깐 너무 길게 늘어놓았네요~ 다시 정리하기도 귀찮아 그냥 나둘께요~ ;;;

 

 

일단 포스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했고 한글로 된 포스터가 있음에도 굳이 일본포스터를 긁어온 까닭은 이 영화가 '일본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일본영화라는 것을 한 번 말했는데 여기서 또 말하네요~ ㅎㅎ 1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의 특징으로 무국적성과 무시대성을 말한 바 있는데, 그저 영화에만 집중하고 보면 이 작품이 일본영화라는 점을 '망각'하고 볼 위험(?)이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안 보고 2번 모두 집에서 봤지만, 혹시 이 작품을 극장에서 보신 분은 그저 멋지고 재미있는 영화 하나 봤다고 생각하지, 굳이 이 영화가 일본영화라는 점은 잊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작가의 배경을 감출 수 있는 가장 좋은 장르가 '에니메이션'이거든요....;;; 그저 시간 때울려고 보는 게 아니라면 이 영화는 일본인의 눈으로 바라본 이탈리아의 프리랜서 파일럿 영화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거 같습니다.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돼지가 된 한 프리랜서(적절한 한국어 대응어를 찾기가 힘드네요~ ^^;;) 파일럿, 포르코 로소는 공적(하늘의 해적)과 적절하게 공생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이 도둑질을 해도 그들을 죽이거나 또는 그들이 강탈한 돈을 죄다 빼앗지 않고 그들도 먹고 살도록 배려해주죠~ ^^;;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은 포르코의 환상적인 비행실력입니다. 포르코 로소는 아드리아해의 NO.1파일럿입니다.

 

항상 당하기만 했던 공적들은 미국에서 온 파일럿 커티스를 용병으로 고용합니다. 자신의 비행정을 고칠 필요를 느낀 포르코는 단골이 있는 밀라노로 가는 도중에 커티스를 만나죠... 커티스를 용케 따돌리는가 싶더니 포르코의 비행정은 추락하고 맙니다. 호랑이 없는 산중에서는 여우가 왕이라고, 커티스는 자신이 NO.1이 된 것 마냥 갖은 허세를 부리죠...

 

잠시 피해있던 포르코는 자신의 비행정 잔해를 갖고 밀라노에 도착합니다. 밀라노에는 오랜 단골인 피콜로가 있습니다. 피콜로는 자신의 조카인 피오에게 일을 맡깁니다. 포르코는 어린 여자 아이가 무슨 비행정을 설계하냐며 떨떠름해하지만, 피오의 열정을 보고 피오에게 비행정 설계와 제작을 의뢰합니다.

 

 

비행정 제작과정이 좀 재미있습니다. 마을의 남자들은(밀라노도 큰 산업도시인데 모두 어디로 갔는지;;) 죄다 외지로 돈 벌러 나갔고 여자들만 남아있다고 해서 비행정 제작은 여자들이(모두 피콜로의 친척들 ;;) 도맡아 합니다. 마치 마을의 공동작업을 하는 것처럼 모두 시끌벅적 즐겁게 일하는 데 이런 과정에서 바로 예술 작품이 탄생하는 거죠...뭐 즐거운 건 즐거운 거고, 중요한 건 물적토대가 마련되어야 하죠... 피콜로의 작업장에는 두 가지 물적토대가 있습니다. 하나는 돈을 대주는 물주 포르코(;;) 다른 하나는 장인들이 모여있는 밀라노 공방촌(산업단지라는 말도 있는데 아무래도 공방촌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 합니다)이죠... 아마 중요 부품 조달은 공방촌을 통해 했을 것입니다.

 

이 밀라노의 공방촌은 대량 생산을 위한 산업화가 진행되던 이탈리아의 상황과 대비됩니다. 본래 대량 생산이라는 개념은 영국에서 처음 생겨났습니다. 영국은 일찍부터 해외로 눈을 돌려 해외에서 원료를 수입하고 국내에서 대량생산을 해서 해외에 내다 파는 과정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영국은 축적된 부를 각국에 투자함으로써 제국주의 확대의 토대를 마련합니다. 여기에 자극받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도 영국의 뒤를 쫓아 산업화에 나서게 되는데, 사실 이 과정은 매우 폭력적으로 이뤄졌죠...채플린의 '모던타임즈'를 보면 단순작업을 통한 대량생산이 인간의 가능성을 얼마나 파괴하는지 희극적(희극적이어서 오히려 그 비극이 더욱 강조됩니다)으로 보여줍니다.

 

어쨌든 대륙의 장인들은 각자 살아갈 길을 개쳑해야 했습니다. 일부는 시대의 흐름을 좇아 기계를 들여와 대규모 생산설비를 들이고, 일부는 계속 가내수공업 형식으로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켜나갑니다. 자신들의 생산품은 단순한 소비품이 아닌 하나의 '작품'이라는 인식으로 만드는 것이죠...프랑스나 이탈리아에는 유난히 명품 브랜드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이런 명품 브랜드가 하나의 소비제품으로 인식되지만 원래 명품은 소비대상이 아니죠... 고이 모셔두면서 '감상'하는 하나의 작품입니다.

 

2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포르코의 비행정 제작 과정 중간에 대량생산으로 만들어진 국가의 비행기가 나옵니다. 포르코의 비행정은 포르코가 자신의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하기 위한 포르코의 '동반자'였다면, 대량생산을 통해 만들어진 파시스트(이미 국가가 파시스트에게 점령되었기에)의 비행기는 파괴를 위한 소모품에 불과하죠... 포르코는 자신의 자유로운 비행을 위해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했는지도 모릅니다.

 

 

비행정은 완성되었습니다. 파시스트의 견제를 받던 포르코는 시험비행를 생략한 채 바로 비행에 나섭니다. 시험비행 없이 바로 나섰기 때문에 비행정 설계자이자 제작자인 피오는 이번에는 정비사(그리고 채권자의 역할도 겸해서)로서 같이 길을 나섭니다. 포르코는 밀라노를 떠나면서 자신의 동료였던 한 군인(이름이 기억이 안나요 ㅠㅠ)의 도움을 받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좀 뭉클하더라구요.. ^^;; 각자 가치관이 달라 같은 시대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친구사이의 의와 정은 남아있는 모습....동양이든 서양이든, 옛날이든 현재든 언제나 감동을 줄 수 있는 소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포르코는 커티스와 다시 한 번 대결을 펼치게 됩니다. 포르코와 커티스의 대결은 왁짜지껄한 축제 분위기 속에서 치뤄집니다. 이 축제 장면도 참 재미있죠.... ^^;; 민중들이 스스로 즐거움을 느끼고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축제를 벌인다~!! 또한 이 축제를 통해 서로가 하나됨을 느낀다. 바로 축제의 의의죠... 포르코와 커티스의 대결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닐지 모릅니다. 전체주의가 엄습하던 시기에 민중이 모여서 축제를 벌여 한바탕 망각의 시간을 갖는다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부를 장악하던 파시스트들의 입장에서 보면 포르코나 공적 일당 모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치워버려야 할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을 '새로운 인간'의 창조라고 했습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여러 만행 중에서 테러와 강제 수용소를 주목합니다. 이 테러와 강제 수용소는 과거 공포정치가 이뤄지던 시기의 침략전쟁, 노예제, 강제수용소와 구별된다고 보았습니다. 공포정치의 경우 초기 단계에서 발생한 과격한 유형의 테러가 노린 유일한 목적은 반대파를 패배시키는 데 있다면, 전체주의 아래에서 자행된 테러는 정권이 더 이상 반대파를 겁낼 필요가 없는 상태에서 이뤄졌습니다. 이 테러는 죄없는 희생양을 만들고, 법을 전적으로 무시하면서 이뤄졌는데 아렌트는 절멸 행위 그 자체가 전체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본질이라고 보았습니다. "모든 것은 가능하다"라는 선동 구호로 시작된 전체주의는 "모든 것은 파괴될 수 있다"로 변질되고 만 것입니다.

 

그 목표는 인간 존재의 완벽한 지배인 '전체적 지배'의 확립입니다. 인간은 자연이나 역사의 운동법칙에 저항하거나 간섭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것이죠.. 무기력한 인간을 창조해 세계를 파멸시키고자 하는 절대악의 세계 개조라고 보았습니다. 전체주의가 말한 '새로운 질서'란 모든 것이 파괴된 바로 '그곳'이죠...

 

굳이 아렌트를 꼬박꼬박 주어로 넣는 까닭은 저는 이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너무 이념적으로만 바라보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곳에 모여든 인간들은 아무래도 이념보다는 이익을 위해 모였기 때문이죠... 또 그게 제가 생각하기엔 나치나 파시스트의 가장 합당한 생각이구요~ 엄청난 대학살과 나치의 철저한 이념 교육을 봐왔던 아렌트였고 또 이를 극도로 증오했던 아렌트였기에 이런 생각을 했다고 보입니다. 사실 이탈리아의 전체주의는 독일의 그것과 비교해 그렇게 철저하지 못했죠...;;

 

 

이탈리아의 파시스트가 국가 전체를 장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압박 속에서도 숨쉬고 있던 시민 사회가 있었습니다. 전체주의 이론 가 칼 프리드리히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이를 '단절의 섬'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를테면 독일의 과학자 사회나 이탈리아의 카톨릭 교구, 협동조합을 들 수 있습니다. 포르코와 커티스의 대결에 몰려든 사람들의 축제를 '단절의 섬'으로 볼 수 있을까요?? 포르코와 커티스는 대결을 끝낸 후 여기에 모인 사람들을 잡으러 온 이탈리아 공군을 따돌리죠..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무리를 가만두지 못하는 법입니다. 특히 그가 독재자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죠... 멀리 볼 것도 없습니다. 제 4공화국의 유신정권이 그러했고, 제 5공화국의 삼청교육대가 그러했습니다. 또 이는 유(儒)와 협(俠)을 국가를 좀 먹는 무리로 본 법가의 이념이기도 합니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버리려는 시도...

 

 

그런 시도가 어느 정도 성공할 수는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경제 개발을 위해서는 '불가피'하다고까지 얘기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단지 먹고 살기만을 바라는 '돼지'는 아닐 겁니다. 자기 의지대로 살아 숨쉬고, 자기 의지를 표현하고, 자기 의지대로 살아가는 존재, 즉 자유로운 존재가 바로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이를 파괴하고자하는 공작은 어느 시대고 어느 곳이고 간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바로 이게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포르코의 외양은 돼지지만 이 곳에서 누구도 그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만화여서? 그가 힘이 쎄서? 그가 돈이 많아서? 여러 곳에서도 얘기 됐지만 포르코의 외양은 '상징'이죠...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한 한 사람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형상화시켰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한 포르코는 자신의 비행을 통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소망을 말이죠... "날지 않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야!" 정말 멋진 대사입니다. ^^;;

 

 

(덧붙이기) 8/28일 경향신문 만평 장도리

 

 

 

 

이 만평이 나온 배경 “지브리 스튜디오는 3D애니 제작할 생각 전혀 없다” 

 

기사 中

 

“지브리 스튜디오는 3D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현대사회는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모든 것이 디지털화돼가고 있는데, 지브리는 인간의 수작업으로 해나가는 게 어디까지 가능한가를 생각할 뿐입니다.”


 

 

과연 장인들의 자존심입니다. ^^;;

posted by namasca
2010. 12. 6. 16:08 Miscellany

20XX 봄 어느날

 

 

몇 년간 계속된 가뭄과 홍수로 북한의 식량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북한은 질질 짜며 국제사회에 식량지원을 요청했으나 남한의 적극적인 대북압박 외교로(한나라당이 천하통일 ㅡㅡ;;) 중국을 제외한 국제사회는 북한의 비극을 외면한다. 북한은 울며 겨자먹기로 중국에 식량지원을 요청한다. 그러면서 중국과 북한은 비밀조약을 맺는다. 중국 외교에 정통한 정보원에 따르면 청진과, 함흥, 그리고 신의주의 항만을 중국이 100년간 무상으로 이용 할 수 있는 권한을 이양받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북한 내 각종 광산 개발권도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소식도 전해온다.

 

 

 

 

20XX 여름 어느날

 

 

중국으로부터 썩은 쌀 100만톤이 도착한다. 썩은 쌀을 보내준 중국에 대한 북한 인민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북한 인민의 분노는 중국 뿐만 아니라 북한 정권으로도 확산된다.

 

지방 곳곳에서 북한 정부에 대한 성토회가 열리고 어디 함경도 동부지역은 반정부세력이 접수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북한 정부는 이를 탄압하려 하지만 경찰과 군대가 말을 듣지 않는다. 이 와중 김정일은 사망한다.

 

 

 

20XX 늦여름 어느날

 

 

김정은 체제가 불안하게 출범한다. 하지만 국방위원장에 오른 김정은은 전혀 군부를 통제하지 못한다.

 

 

불안함을 느낀 김정은은 중국으로 도피한다. 군부는 이를 감추려고 했으나 중국 관영방송은 김정은이 이곳으로 와 있다는 방송을 대대적으로 내보낸다. 이 소식이 전해진 북한 곳곳에서 주민은 들고 일어나며 각 지역 관청을 습격하기 시작한다. 군인들도, 관리들도, 당원들도.... 북한은 아노미 상태다.

 

 

 

20XX 늦여름 어느날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으로부터 이 소식을 듣고 이 문제를 협의하려 하지만 누구와도 얘기할 수 없다. 중국대사관은 일시적으로 문을 닫아버렸다. 북한과 연락할 채널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는 사이 중국은 난민유입 방지와 북한 내 자국 자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북한에 군대를 보낸다. 대한민국과 미국은 이에 항의하며 공동으로 관리하자고 중국에 제의하나 중국은 이를 거절한다. 대한민국과 미국은 북한에 아무런 권리가 없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또한 중국은 대한민국과 미국이 북한에 무단으로 군을 보내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며 강경하게 나왔다.

 

 

20XX 늦여름 어느날

 

튼튼한 것 같았던 한국과 미국 사이의 입장차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된다. 한국의 외교부 대변인 OOO은 "중국의 이번 조치는 대한민국 헌법을 무시하는 처사로 우리는 여기에 강경대응하겠다"며 군대를 보낼 것을 시사했다. 반면 미 국무부 OOO대변인은 "중국이 현명한 행동을 하길 바란다"며 "북한의 난민 유입이 문제라면 우리가 도울 방법이 있다"고 밝혔다.

 

 

한편 남한은 북한 난민이 대거 유입돼 문제가 된다. 이에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당장 주석궁에 탱크를 몰고 태극기를 꼿아 북한을 접수해야 할 것"이라며 강경대응을 주장했고,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미국과 협의해서 진행해야될 사항"이라며 "경제적 이해득실을 따진다면 북한 흡수는 시기상조"라고 주문했다.

 

 

정부는 미국과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외교통상부 장관을 미국으로 보냈다.

 

 

 

20XX 가을 어느 날

 

미국은 원칙적인 입장만 밝혔다. 북한의 평화적인 관리.....

 

 

그런데 뉴욕타임즈에 특종이 실렸다. '미국! 중국과 비밀 협정'  북한을 관리하기 위해 미국과 중국이 비밀 협정을 맺었다는 기사였다. 중국과 미국은 각자 군대를 파견해 북한의 동쪽 지역은 미국이, 서쪽 지역은 중국이 맡아 향후 5년 동안 치안을 담당한다고 협정을 맺었다.

 

이 소식이 전해진 남한 내 여론은 양극으로 나뉘었다. 조갑제씨는 "지금은 중국이고 미국이고 통일을 위해서는 5000만 국민이 뭉쳐야 할 때"라며 계속 강경 대응을 주장했다. 반면 김진씨는 "미국의 결정은 현명한 처사"라며 "미국과 중국이 북한을 관리할 동안 우리는 역량을 키운다면 북한을 접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정부는 이리 저리 눈치를 보다 미국과 중국의 결정을 환영한다는 논평을 내고 기다리기로 하였다.

 

 

 

5년 후

 

 

미국과 중국의 협정은 연장되었다. 조갑제씨는 계속 통일을 주장했고, 김진씨는 계속 시기상조를 외쳤다.

 

 

북한 내 각종 광산 운영권은 미국과 중국이 나눠가졌으며, 북한에서도 자본주의가 발전되기 시작되었다.

 

 

 

또 5년 후

 

 

미국과 중국의 협정은 또 연장되었다. 조갑제씨는 계속 통일을 주장했고, 김진씨는 계속 시기상조를 외쳤다.

 

 

북한의 자본주의는 더욱 발전해 1인당 GDP가 10,000달러에 육박되었다.

 

 

 

또 5년 후

 

 

미국과 중국은 향후 100년안에 북한을 남한과 협의해 넘기겠다고 했다.  조갑제씨는 죽었다. 김진씨는 계속 시기상조를 외쳤다.

 

 

남한의 자본주의도 발전하고 북한의 자본주의도 발전을 계속했다. 먹고 살면 무슨 통일이냐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 뭐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리는 세상인데 민족이고 통일이고 무슨 상관인가??

 

 

한편 정부는 국사를 완전 선택과목으로 지정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교과목에 필수로 '경제야 놀자'가 신설되었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

 

 

언젠지 모르겠는데 헌법에 '통일'이라는 단어는 사라졌다.

posted by namasca
2010. 12. 6. 15:59 Miscellany

우선 저는 기독교에 대해 별 감정은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꼬박꼬박 읽긴 하는데 그저 이야기 책으로 삼아 읽는다고 해야할까요?? 뭐 정확히 말하면 기독교에 대해 조금은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지난 주 이곳도 그렇고 자게도 그렇고 종교 문제로 참 시끌벅적했습니다. 뭐 대부분은 기독교를 까는 내용이더라구요...;; 저도 분명 일부 기독교인(일부긴 하지만 그 일부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소수가 아닌 다수입니다)의 비정상적인 행태가 참 못마땅합니다. 비판은 물론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도 그 비난을 귀담아 듣고 자신들의 종교생활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교회라는 조직이 뭡니까? 커뮤니티, 즉 공동체 아닌가요?? 정말로 교회가 공동체라는 의식이 있다면 일부 기독교인에 대한 비난을 자신의 비난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뭐 지금처럼 조각조각 나뉜 기독교 교회에 대해 제 3자인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주제 넘는 짓이라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제가 듣기론 정말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는 교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용기가 나지 않아 그 분들과 동참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 분들의 뜻만큼은 백분 공감합니다. 어쨌든 기독교에 대한 제 생각을 먼저 정리해서 말씀드려야 할 거 같아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




제목대로입니다. 정말로 리비아에 한국인 목사가 선교하러 떠났을까요?? 엠비씨 뉴스에 나온 이후로 이 뉴스는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단 엠비씨 뉴스를 링크 걸어놓습니다.


리비아 교민 1명 추가 체포‥ 교민사회 '술렁'

뉴스 中

리비아 현지 한국 대사관은
목사 고모씨가 지난달 중순
종교법 위반 혐의로 구속 된 뒤,
고씨의 선교 활동을 돕던 교민 주모씨도
지난주 체포됐다고 밝혔습니다.

고 목사는 몇 년 전 유학생 신분으로
리비아에 입국해 수도 트리폴리에서
선교 활동을 해 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뉴스의 소스가 어딘지 유심히 보시길 바랍니다. 대사관입니다. 그 뉴스에 의심을 갖게 된 계기는 오늘 미디어오늘에 실린 기사 때문입니다.



[단독]한국 외교관, 가다피 국가원수 정보수집 혐의로 추방…현지 언론보도 충격



기사 中



앗샤르끌 아우싸트 등 아랍 언론들에 따르면 리비아 정부보안 당국은 지난달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는 외교관이 리비아 정부요인 정보수집, 무아마르 알 가다피 국가원수의 국제원조기구 조사, 가다피 원수의 아들이 운영하는 아랍권내 조직에 대한 첩보활동을 한 사실을 파악하고 한국정부에 문제제기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리 비아는 이 직원이 외교관 신분이기 때문에 구속수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계속해 수사를 벌였으며, 우리 정부에 항의하는 표시로 한국에서 리비아 대표부 직원들을 철수시켰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가 리비아 대표부 폐쇄가 아니라 일시 업무 중단이라며 여름 휴가철이 끝나면 업무가 재개될 것이라고 해명해 왔던 것과는 거리가 있는 보도다.





물론 그 출처가 리비아 언론이라는 점에서 100%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대사관 말만 100% 믿기도 어렵죠... 리비아에 한국인 목사가 간 것 만큼은 사실인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리비아에 선교하러 간 건지 아니면 그곳 교민 대상으로 사목활동을 하기 위해 간 건지 구분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선교하러 갔다고 해도 지금껏 리비아에서는 기독교 선교로 인해 외국인을 구금한 전례가 없다고 합니다. 리비아가 미국과 관계도 안 좋고 독재자 카타피가 몇 십년동안 정권을 휘두르고 있는 폐쇄적인 국가지만 이슬람원리주의로 지탱되는 국가는 아닙니다. 적어도 탈레반과 같은 이슬람원리주의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리비아와의 관계를 생각해본다면 선교하는 목사 한 명때문에 양국 관계가 이렇게까지 파탄날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이 사건에 대한 분석을 뒤틀리게 한 게 아닌지 되돌아 볼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기독교계에서 하는 대대적인 선교활동을 찬성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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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만한 댓글들)

 

 

개신교 선교의 떡밥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었던 사례군요.

그걸 장로 대통령이 사용했다는게 웃음의 포인트가 되겠구요.

일단 뽑았으니 일 잘할 수 있게 믿고 기다려주자던 그 '교회쟁이'들 중 일부라도 그 맹신을 깰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시토방 어떤 글에서 인용함.)


개신교 선교는 예수를 믿으라는 말밖에 없지 그 알맹이가 없기 때문에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이땅에도 이루어지도록'

만들어나가려는 진보에의 노력이 예수가 말한 복음의 정수일진데

그들은, 그리고 제자신도 아직 달을 보지 못하기에

손가락도 검지가 아니라 반대쪽을 가리키는 중지나 약지를 보여주고는 말죠.


...저도 덜 억압적인 공동체주의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게시판에 댓글이라도 달고 글을 읽어본지 이제 한 한달 가량 되었나요...

글들 읽어보면 이 글쓴 분과 생각이 겹칠 때가 참 많네요.^^

(우리네 삶이 쪼개고 쪼개어지면 항상 어느 것과 어느 것의 경계 사이에 존재할 수밖에 없을텐데

오히려 그 미묘한 외줄을 걸어가면서, 그 외줄을 포기하지 않는게 더 칭찬받을 일이죠 뭐...)


아무쪼록 많은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이슬람, 모든 종류의 기독교와 동양의 뛰어난 종교전통들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인간을 포함한 생명과 지구의 조화로운 삶을 위해 오늘을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개신교인인 저의 입장에선 작은 규모의 구원이라 생각하거든요.

다른 종교의 언어로는 다른 표현을 쓸 수 있을 거구요.


댓글
2010.07.28 13:11:55
[레벨:3]Kie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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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신학생 입니다.

기독교 선교에 예수 믿으라는 말이 알맹이가 아니면 할 말 다 한 겁니다.

이미 기독교가 아닌 것이죠.

천주교처럼 예수 안 믿어도 천국간다 라는 소리 해야 직성이 풀리시렵니까?

개신교인이라고 하셨는데 자조적인 반성을 넘어 자신이 믿고 있는 가치의 옳고 그름 조차 구분 못 하고 계시네요.

개신교 선교에 대해서 얼마나 정통하신지 모르겠지만, 개신교가 흔히들 사회에서 어린 아이들이 씹어대는 것 처럼 만만한 조직도 아니고, 멍청한 인간들만 모여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선교라고 지하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을 외치는 맹신자들처럼 할 것 같습니까?

엄청난 시간과 자본, 인력과 두뇌와 전략이 쏟아져 투자됩니다.

또 그러겠죠.

그 자본 어디서 나냐고.

제 친구, 지인들 꽤 많은 수가 선교사로 나갔는데, 결코 풍족하게 살지 않습니다.

거의 80-90%는 자비로 충당합니다.

가족, 친지, 친구.

교회에서의 지원이요?

제대로 선교에 대한 마인드가 있는 교회면 모를까, 선교사님들 교회로부터의 정기적이고 충분한 원조 거의 기대 안 합니다.

현지에서 직업을 가지거나, 어렵게 어렵게 선교단체를 통해서 지원을 받습니다.

현지에서 현지화 되어 현지인과 같이 호흡하고, 그 현지인들보다 결코 나은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결코 선교가 될 수 없을테니까요.

진보요?

기독교에서의 진보 성향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가요?

범신론 입니다.

기독교의 근간은 유일신 사상입니다.

성경이 가장 기본되는 텍스트이기 때문에, 그 성경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 기독굡니다.

진보 기독교인들은 이 성경을 넘어서서 사상의 바벨탑을 만들고 있죠.

이 땅 위에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 진보를 추구한다 라고 하셨는데(아마도 예수님을 진보적 사회 개혁자로 묘사하는 김규항씨의 영향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하늘 위의 가치들을 이 땅 위에 오게 하기 위해서 하는 노력이 선굡니다.

모든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상태 가 저 하늘의 상태죠.

심지어 김규항씨도 진보를 위해서 성경을 넘어서는 해석이 필요하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했지.

선교에 알맹이가 없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오지의 기독교 선교에서 예수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한참 훕니다.

선교를 위한 주변 상황들을 개선하고 정리하는게 첫 임무입니다.

제가 아는 선교사님께서는 20년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못 한 지역에 계속 계셨는데, 기독교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0년 남짓입니다.

그 10년간 그 국가의 종교성을 대상으로 수없는 설득을 하셨고, 수많은 핍박과 공격을 이겨내면서 사회의 종교자유를 위한 '진보'적 활동을 해 왔습니다.

그 결과 그 국가는 현재 거의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국가가 되었죠.

맹목적이고 알맹이가 없다고요?

정말 기가찹니다...

속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한다면 그래, 모르니까 그럴 수 있지 뭐 라고 넘기겠는데 이건...


반성도 좋고, 비평도 좋습니다.

하지만 제발 자신이 믿는 가치를 조롱하진 말아 주십시오.

기독교인 자체가 기독교를 싸잡아 비난하고 욕하는데 대체 누가 기독교를 좋아하겠습니까?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하듯, 현대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은 믿는 자들의 회의입니다.

그간 개신교계가 정말 형편없이 한 일들도 많았고, 맹목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천편일률적인 목회 시스템으로 현대에 맞지 않는 가치를 전달했다는 것 알고 있고, 그로 인해 자조적인 성격의 성도들이 등장했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깨치기 위해서 목회자, 신학자, 신학생들은 부던히 노력해와서 그 결실을 보이고 있는데, 회중들은 아직도 똑같은 자조만 날리니...

갑갑하네요.

인터넷에서의 토론/포럼 글엔 대꾸도 하지 않고, 댓글도 달지 않지만(결론이 나지 않고 결국엔 현학적 자아도취에 빠질 뿐이기에), 정말 답답하고 안타까워 한 글 남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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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8 13:44:41
id: namascanamas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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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신학적인 거에 대해선 제가 뭐라고 할만큼 아는 게 없으니 다만 이거 하나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터넷에서 하는 토론, 특히 종교에 관한 토론이 답이 안나온다는 건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얘기를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완전 이 세상을 부정하는 종교가 아니라면 어차피 종교도 이 사회 속에서 같이 살아 숨쉬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선 기독교인들만 끼리끼리 모여서 얘기하기 보다는 보다 폭넓은 사람들과 접촉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도구 중에서 저는 가장 좋은 게 인터넷이라고 생각하구요... 물론 종교에 대해 악의적인 비난이 많이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피하는 건 오히려 기독교를 더욱 더 폐쇄적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요?? 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말이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하는 말이에요~ ^^;;

 

(덧붙이기) 제가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결코 피하지 않았죠... 우리 기독교계에도 그런 분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댓글
2010.07.28 22:37:12
[레벨:4]BeersIn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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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쓰신 분께 미안한 말씀 전합니다.

본문과 다르게 댓글이 이어질거라는 생각은 못하고 애초에 제 신학을 뜬금없이 달아버렸네요.

제 댓글의 댓글이 좀 말할꺼리가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또 장문의 댓댓댓글을 달았습니다.


댓글
2010.07.28 22:30:54
[레벨:4]BeersIn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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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반갑습니다. 저는 신학 대학원 휴학생입니다.
그래도 한국에서 상당히 큰 교단 소속의 인가된 신학교임을 밝힐테니 혹시 다른분이시라도 야매를 의심하지 않으시길....ㅋㅋ

신학생의 신분을 밝혀서 앞으로 게시판 활동에서 많이 제약을 받게 되겠지만
아무래도 님이 먼저 신분을 밝히셔서
다른분들이 보시기에 제가 먼저 단 댓글이
신학적인 고민없는 얄팍한 '조롱'으로 보여질까봐 어쩔 수 없이 밝히게 되네요.

아! 제 동기 중 한 형이 곧 캄보디아로 선교하러 떠나십니다.
솔직히 이 형은 줄을 좀 잘 선 편입니다.
전도사로 있던 교회에서 나름 지원을 해주셔서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선교를 떠나게 되었지요.
더 좋은 조건의 필리핀 선교도 제의가 들어왔는데 기도 열심히 하더니 캄보디아 간다네요.


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독교 선교에 예수 믿으라는 말이 알맹이가 아니면 할 말 다 한 겁니다.

이미 기독교가 아닌 것이죠."

하지만 그 뒤에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는 어떤 신학적인 내용도 없습니다.

그저 그게 아니라고 말한다면 넌 개신교가 아니다는 말이 반복될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무엇이 알맹이인지 말씀드리기 전에 님이 그게 왜 알맹이인지 말씀해주시는게 먼저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이글을 몇번씩 정독을 해봐도 건질 수 있는 거라곤 '종교자유'밖에 없네요....

님이 기가 차하는 그 이유 한 번 제대로 들어보고 싶네요.

그걸 밝히지 않으시면 저도 기가 찰 수밖에 없어요.


저도 선교를 고민한 적이 있는지라 님이 묘사하신 선교의 모습들을 딱히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이것도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대화를 통해 이야기해봐야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구요.



기독교의 진보성향이 범신론이라시면 저야말로 기가 찰 뿐입니다.

님을 비롯한 기독교인들, 특히 개신교인들의 신앙관이 매우 배타적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인격적이고 전지전능한 유일신론 외에는 모두가 다 진보성향이 되어 버리죠.

세상의 많은 신학자들이 기도하고 고민하며 발전시킨 개념들을

이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르니까 깊은 사유없이 모조리 범신론이니 적그리스도니 해버립니다.


전 종교다원주의자입니다.

하지만 칼 라너나 폴 니터와 같은 종교다원주의가 아니라 과정신학자 존 캅의 입장과 더 가깝습니다.

(신학생이시니 깊게 설명드리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하나님 개념의 근간 역시 진보 기독교인들도 성경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집트 땅에서 노예살이 하던 히브리 민족을 구원한 야훼신과 가나안 지방 토속신인 엘과의 만남이 그 출발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기를 거쳐서 민족 단위 개념의 신이 전지구적으로 확대된 것이 오늘날 보편적 유일신이 된 겁니다.


보수 기독교인들은 참 성경 성경 말씀들 많이 하시는데

애초에 성경을 읽는 관점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그 관점도 성경에서 나왔다 그러시지만

성경을 기록한 기자들부터 주관적인 입장에서 (그들이 그것을 의식했는지는 모르지만) 작성된 것인데

실체없는(여기도 보면 알맹이가 없네요.) 성경적 관점 언급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인들의 사고와 대화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것 모두 신학교, 신학대학원 1학년이면 성서해석학이니 신구약개론으로 다 배우는 내용인데

이걸 제대로 배우고 중간,기말고사 점수도 잘 나온 사람이면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 싶네요.


진보 기독교인이 사상의 바벨탑을 만들고 있다.....

먼저 바벨탑 너머에, 혹은 꼭대기에 앉아있는게 누구일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남한에서 신학을 독점하고 다른 신앙에 대해서 이단 심문관이 되어 손가락으로 처형을 내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네요.


바벨탑 신화가 우리에게 주는 무시무시한 교훈에 대한 성찰 없이 창세기 11장을 함부러 언급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선악과도 그랬고, 바벨탑도 그랬고

인간이 신과 똑같이 되려는 어떠한 시도도 더 위험한 결과를 초래했음을 이 신화는 경고합니다.

그래서 저도 개신교인의 제일 책무는 항상 인간에게 자신의 오만과 독선에 대해 경고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개신교내 종교권력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가장 먼저 받아들여야할 교훈이기도 하지요.

신학생이시라면 평신도나 장로님들보다도 더 좋은 기회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신학을 점검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그것을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고 그래서 항상 깨어지는

그런 삶의 자세를 만들어갈 기회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알맹이라고 생각하고 전의 댓글에서 언급한 진보에의 노력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저 물론 김규항씨를 매우 통찰력있는 좋은

출판인(? 왜냐하면 주력하시는 일이 좋은 아동잡지를 만드시는 분이라서...)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도 깎고 있는 제 신학과 신앙에 도움을 주신 분들은 그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평택 대추리에서 사람들이 오랫동안 살던 곳에서 쫓겨날 때 가장 먼저 이주비 챙기고 이웃들을 떠났던

그 동네 교회 목사님도 큰 반면교사가 되었구요.



에릭 클립튼은 먼저 하늘로 떠난 자신의 어린 아들을 생각하며 저 하늘에서도 널 보면 눈물을 흘릴까 독백했었고...

전 먼저 생을 마감한 나의 동료들에게 저 하늘에서도 널 보면 맥주 한 잔 같이 마실 수 있을까 해서 패러디 아이디를 씁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던 예수님은

하늘에선 자신의 이름을 믿는 상태라고 생각했을까요.....


신학계에서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라고 생각하고

'나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유형의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를 말한다고 보는게 정설이지요.

신학생이시라 아시겠지만 '나라'로 번역된 그리스어 바실레이아는 통치의 개념도 함께 포함하고 있거든요.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진 것은 하느님의 통치입니다.

예수님의 주옥같은 비유들은 이 통치를 설명하고 있구요.

힘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그들이 서로 웃으며 지내는 세상이고

먼저 된자가 나중되며, 산과 골짜기를 평평하게 만드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통치 핵심, 알맹이인 겁니다.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이 통치를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선교도, 목회도 이 땅에서 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을 먼저 살아가는 운동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선교나 전도는 진보운동인 것이지요.

적화사업, 아니 교회다니시는 분들 화이트앤젤 좋아하시니까 백화사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성찰이 없는 개신교인들이 그저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는 것은 알맹이가 빠진 겁니다.

처음에 언급한 제 동기 형은 이러한 성찰을 바탕으로 선교를 나갑니다.

하지만 님처럼 그저 기가 차는 사람들에게 이 형은 기가 차는 겁니다. 전 옆에서 기가 차는 거구요.


님의 비평 행위도 좋습니다. 다만 기가 차서 할말, 해야할 말 다 하신게 아니기 때문에 좀 아쉽지만요.

제가 믿는 가치는 제 스스로에 의해서 언제나 비판받고 침범당하고 다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항상 저는 '동료' 개신교인들에 대한 비판의 끝은 저에게 돌리려고 노력합니다.


저와 같은 신앙인들에게 가장 큰 적은 믿는 자들이 회의하지 않음입니다.

그들이 자기의 신앙을 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게다가 그들은 다수인데다가 힘도 엄청 쎄기 때문에 우리들도 같이 욕먹습니다.


삭제 수정 댓글
2010.07.28 23:20:07
id: namascanamas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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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씩 읽고 또 읽게 하는 글이네요~ ^^;;


하느님의 통치처럼 막연히 알고 있는 것도 있었고, 바벨탑 이야기처럼 잘 모르고 있는 것도 있어서 이글을 통해 생각의 폭이 참 넓어짊을 느낍니다. 마치 꾸불꾸불한 오솔길을 오르고 난 후 산 위에서 볼 수 있는 광경처럼 말이죠...^^;; 뭐 아직 오를 산도 많이 남았고, 위에서 본다고 아래 펼쳐져 있는 마을을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겠죠... 그래도 산 아래에서 막연히 저 위에 오르면 무얼 볼 수 있을까 항상 궁금했는데 조금은 알 거 같다는 느낌입니다.


처음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서 참 궁금했던 것 중 하나가 어째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책을 남기시지 않았나였습니다. 물론 이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 공자도 마찬가지죠...;;; 그래도 확실하게 말해주셨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그 해석을 둘러싸고 그렇게 다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했습니다. 유교도 공자의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참 오랫동안 다퉜죠..;;


그러다 칸트의 윤리학을 접하고 성경을 다시 읽으니깐 눈에 조금 들어오는 거 같더라구요... 칸트는 인간의 이성자체가 이성의 능력을 넘어서는 가상을 만들어낸다고 보고 이를 형이상학이라고 불렀죠... 그리고 이 형이상학은 이론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실천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했죠...


아마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보인 모습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진리를 찬란한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보다는 직접 '몸'으로써 보이셨으니깐요...;; 보면 홀로 사색하는 모습보다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 먹고, 얘기하고, 치료하고, 격려하는 등등.... 주위의 높은 분들이 율법이 어쩌고, 규율이 어쩌고 말하는 동안 예수께서는 직접 몸으로 민중과 부딪히면서 진리를 보이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두 분의 얘기를 들어보니깐 선교가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 주위에 선교하러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바로잡을 좋은 계기가 됐습니다.

댓글
2010.07.29 03:25:17
[레벨:4]BeersIn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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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느끼지만 글이 참 차분한 것 같습니다.

최근에 읽으면서 공감을 많이 하였던 진중권의 글입니다.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3029&article_id=61581


신학적으로 단순화한다면

예수님은 터키 인형, 하느님 나라는 등굽은 난쟁이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저같은 좌파 예수쟁이나 어떤 우파 예수쟁이도 문제는 시도때도없이 그 난쟁이를 들이대고만 있는 것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님이 생각한대로 예수의 말보다 앞선 실천이야말로

오히려 이 시대의 예수쟁이들이 '믿을'만한 것이라 생각되네요.


댓글
2010.08.01 14:36:25
[레벨:3]Kie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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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려다가, 그래도 내가 싸지른 글에 기분 상하셨을 기분을 생각해서 어떤 글을 올리셨는가 보고 사과를 드리던 말을 접던 하려고 댓글을 봤습니다.
신학대학원생 이셨군요.
뭐, 이래저래 할 말도 많겠고, 쓸 말도 많습니다만, 안 보는 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말씀 드렸던 현학적 다툼밖엔 되지 않는다는 말씀, 다시 드리고 싶습니다.


전 신학적 다툼을 왈가왈부 하자는 것이 아녔습니다.

선교에서 예수 믿으세요 다음에 무슨 신학적 바탕이 필요한지 전 모르겠네요.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조직신학도, 그 조직신학을 바탕으로 세워진 웨스터 민스터 강요(대/소요리 강요)나, 사도신경(니케아 신조) 역시도 예수에서 시작해서 예수로 끝나는데 이 외에 무슨 신학적 근거가 필요한가요?

필요하다고 생각해 봐도, 그 것이 님의 글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되려 예수의 이름은 아주 작아져 보이네요.

아무튼, 제가 생각도 성찰도 없이 싸질러 놓은 선교에 알맹이가 없다는 글에, 이렇게 신학적 근간들을 써 놓으셨는데, 그래서 알맹이가 채워졌나요?

제가 보기엔 전혀 없는데요, 채워진 것이.

채워진 것이 있다면 님의 자기만족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신학에 굉장히 박식하신 것 같은데요, 앞으로도 정진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저는 뭐 이래저래 뺑뺑이 돌다가 이제서야 신학대 졸업 늦게 하고 대학원 준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만,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제출한 논문(솔직히 리포트에 가깝지만)들은 교수님들께 종종 대학원생보다 높게 평가 받기도 했구요.
자랑 좀 하자면, 제 논문을 자기가 좀 차용해도 되겠냐는 교수님들도 계셨고, 실제로 쓰신 분도 계시구요. ^^;;

아무튼.

도통 성서해석학이든, 신구약개론이든 제가 배운 부분에서는 성경의 기록이 '주관적' 관점에서 기록되었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바르트나 틸리히 정도는 그렇게 해석했다고는 하지만, 아마도 장로교쪽 신대원은 아니신 것 같습니다.
야메는 아니라고 하셨는데, 연대신대원이나 감리교쪽 신대원을 다니시나요?

어딘지 명확하게 밝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전 그리스도 신학대학교를 졸업했고, 장로회 총회 신학대학교 대학원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실명을 알고 싶으시면 알려 드릴 용의도 있습니다.

의심해서라기 보다는, 정통 개혁 신학쪽에서는 하지 않는 말씀들을 정통이라고 하셔서요.


그리고 진보 개혁 신학자들을 알고 싶으시면,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426047.html, http://well.hani.co.kr/board/view.html?uid=290053&cline=7&board_id=jh_mind 이 기사를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이 기사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 진보 신학의 행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보편적 기사라 걸어 봅니다.

그리고 로마서와 조직신학을 제대로 공부하신 분이라면, 기독교가 다른 종교를 이단 판정하는 것이 사상의 꼭대기에 앉아서 신의 대변자 노릇을 자청하는 자기만족 놀이가 결코 아님을 아실텐데, 그런 소리를 쉽게 하시는 것을 보니 좀 찜찜합니다.

특히,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절대 '다른' 종교를 부정하거나 이단 판정하지 않습니다.

그들과 합의를 할 수는 없지만(최근의 가톨릭은 그렇지 않지만) 그들을 이단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같은 종교내에서 명확하게 조직신학적 근거가 없는 종파를 이단이라고 판정하죠.

특히나 정통 개혁 구약개론에서는 결코 야훼신을 '지방신'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신학을 공부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많이 접하신 것 같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하느님 이라고 하시는 것을 봤을 때, 개신교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만, 실수인 건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김규항씨는 출판인 이라고 알려졌지만, 진보주의자, 평신도 신학자로 더 유명한 분 입니다(종교계에선).

블로그도 한 번 가 보셨으면, 어린이 서적 출판자라는 말은 안 하셨을 겁니다.

검색을 통해 알아보셨나 본데, 기독교 관련 서적 『예수전』 출간하셨으니 보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평신도 신학자 치고는 상당한 수준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드리자면, 개인에 대해서 손가락을 돌리시면서 저에겐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모순이 아닌가요?

제가 바벨탑 사건, 창세기, 성경에 대한 묵상과 깊은 성찰 없이 지껄여 보였나봅니다.

그 외에도 개인적으로는 '이건 도저히 신대원생이 할 발언이 아닌데' 라는 부분들이 많이 보입니다만, 신학적 입장은 차이가 날 수 있으니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제가 기분 상하게 해 드린 것 있으면 사과 드리려고 왔다가 안 오니만 못 하게 됐네요.

신학적 지식을 아무리 뽐낸들, 결국 합의점 찾아진 것 없죠?

생각 바뀐 것 없죠?

인터넷 선교는 굉장히 중요한 활동이지만, 지금 님과 제가 한 행위는 선교도 전도도 아닙니다.

감정과 정신력만 상하고 소비했을 뿐, 아무런 득이 없습니다.

덕도, 본도 되질 않죠.

모쪼록 이후의 말씀은 쪽지로 알려드린 제 블로그에 남기시던가, 쪽지로 남겨주세요.


그럼 건승하시길.

샬롬.

댓글
2010.08.04 01:57:11
[레벨:4]BeersInHeaven
추천 0 / 0 비추   

네^^ 참 우연히도 이 글 보게 되네요.

그리고 님이 처음에 가벼운 마음으로 날린 폭력에 응수할려고 했던 내가 참 허무해집니다.

그렇게 선교하시고 목회하세요 그럼....

님도 잘 아시겠지만 그런 생각 가진 목회자가 매년 수천 명이 배출되는 이곳에서

신학적으로 비판적인 성찰 없이 예수가 모든 것이라는

그저 표어고 언명에 불과한 말만 붙들고 살아가세요 그럼....


블로그에 주력하셔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댓글로 대화하는 건 맨투맨이 아닌데,

자신의 비판만 써놓고는

'합의점이 없을 것이니 더 이상의 대화는 생략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모르시나봐요.

님과 전화로 통화를 한다면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버려도 혼자 기분나쁘고 말 일입니다.

하지만 댓글은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기에 할 수 있는 한 책임을 져야하죠.


왜 더 이상 대화가 안되겠습니까?

전 이번에 님을 통해서 많이 배웠는데....

그건 현학적 자기자랑이기 때문이 아니라

남의 의견을 현학적으로 보는 배알꼴린 심사와 지적 게으름 때문입니다.


댓글
2010.07.29 00:03:54
id: 수평선너머수평선너머
추천 0 / 0 비추   

자신이 좋다고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피해를 입히면서까지 선교를 한다면, 과연 당신네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굉장히 불편해 하실 것 같은데요.

무차별적이고 광적인 선교행위 때문에 되레 하나님 당신이 그리고 교단이 욕을 먹잖아요.

꼭 피를 보고 요란한 문제를 일으키면서 선교를 해야 하는 건가요?

그런 일이 생길 것 같으면 한 발 물러서는게 순리입니다.

선교자나 선교를 받는 자나 옆에서 지켜보는 자나 모두가 기뻐할 때 당신네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 같아요.

최소한 그리하도록 노력하는 교인을 보고 싶어 할 겁니다.

굳이 요란을 떨지 않아도 가능한 일을 억지로 문제를 일으키면서 하려는 까닭은 뭡니까?

 

 

댓글
2010.07.28 00:50:42
[레벨:1]땡알
추천 0 / 0 비추   

알맹이가 없다는 말에 확 공감이 가네요.

 

선교실적주의라고나 할까?

 

무조건 맹신하면 해결된다는 식이라서 거부감이 듭니다.

 

일부의 예이겠지만 공중도덕이나 사회규범을 무시하면서

 

웃으며 다가와 선교하는 분들을 보면 분노를 느낍니다.

 

특히 저에겐 특정 종교가 있다고 하여도

 

무시하며 자신의 종교를 믿으라 하는 태도는 저를 능멸하는 것 같아 분노를 느끼게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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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masca
2010. 12. 6. 15:48 Miscellany

여기에 올리는 첫 게시물입니다. 전에 자게에서 '포화속으로'를 봤다고 하고 이게 꽤 볼만한 영화라고 하신 분이 엄청난 비추를 먹은 적이 있었죠.... 사실 이 영화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는데 그 게시물에 대한 논란을 보고 급관심이 생겨 영화를 보게됐습니다.

 

 

1년에 영화관을 한 두 번 가는 저로선 꽤 대단한 결의입니다~ ^^;;  부디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제발 글을 읽고 평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름 꽤 진지한 문제의식을 갖고 이 영화를 봤거든요... ㅎㅎ

 

이 영화 보기 전에 이런 글도 썼습니다~ ㅡㅡ;;  '전쟁은 볼거리가 아니죠'


본격적인 영화 이야기는 4.부터 시작됩니다. 바쁘신 분은 여기부터 읽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쓰긴 썼는데 써놓고 보니깐 1,2,3 에서는 쓸데없는 얘기만 주욱 늘어놓은 거 같네요... ;; 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고나니깐 느끼는 건데 이 영화는 별다른 반전도 없고 또 서사구조가 약해 내용을 안다고 해도 감상에는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네요...



 

1. 무언가를 감상한다는 것!  그것은 괄호넣기이다!

 

 

처음은 완전 재미없게 칸트 얘기부터 할렵니다. 이건 제 맘이니깐요.. ㅋㅋ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사물 또는 사건을 판단할 때 3가지 판단을 동시에 한다고 합니다. 인지적판단(참인가 거짓인가), 도덕적판단(선인가 악인가), 미적판단(쾌인가 불쾌인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를 칸트의 언어로 바꾸면 각각 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력입니다. 이를 아주 어려운 말로 배배 꼬아서 정리한 게 바로 그 유명한 칸트의 비판 3종세트입니다. (ㅡㅡ;;)



과학자의 경우 세가지 판단 중에서 도덕적판단 또는 미적판단을 괄호에 넣고, 예술가의 경우 사물이 허구라든지 또는 그것이 악이라는 측면을 괄호에 넣습니다. 괄호에 넣는다는 말은 그것을 인지하지 않고 무시한다는 말입니다.

 

 

얘기가 추상적이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뒤샹의 '샘(fountain)'이라는 작품을 아시나요?

 

 

 

바로 이 녀석입니다. 처음 이 작품이 전시회에 나왔을 때 전시회장은 발칵 뒤집혔죠... 눈에 보이는대로 이것은 남성용 소변기입니다. 화장실에서 이 놈을 보면 당연히 여기에 소변을 봐야죠... 그리고 길거리에 이 녀석이 있다면 쓰레기로 폐기처분해야되구요... 그런 물건을 전시회장에 떡 하니 전시해놓은 겁니다. 이 소변기를 예술작품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위의 세가지 판단 중 인지적판단과 도덕적판단은 무시하고 오로지 미적판단을 동원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을 통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가 아닌가만 갖고 이 물건을 판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저는 아직도 이 작품을 오로지 미적판단을 통해 인지하기 힘드네요..)

 

마찬가지로 의사들은 도덕적판단과 미적판단은 괄호에 넣고 오로지 인지적판단을 통해 환자를 대합니다. 그 환자가 예쁘게 생겼든 말든, 그 환자가 나쁜 놈이든 착한 놈이든 간에 의사는 아픈 사람을 치료해야하는 사명감으로 일해야 합니다. 의사들이 그 힘든 트레이닝을 겪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판단을 몸에 익히기 위함입니다. 사람의 신체, 특히 피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기 마련입니다.

 

만약 이런 작업에 익숙해진다면 사람들은 어떠한 판단을 괄호에 넣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게 됩니다. 마치 과학적 대상, 미적 대상, 또는 도덕적 대상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믿는 거죠....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죠...

 

 

 

2.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 무엇을 잊고 보는가?


 

영화관에 들어가면 어떤가요? 주위가 껌껌해지고 앞에 엄청 큰 화면이 나옴과 동시에 쿵쾅쿵쾅거리는 굉장한 사운드가 자신의 주위를 휘감는 걸 느끼게 됩니다.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을 실황연주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굉장한 연주였죠... 그런데 몇 년전 '카핑베토벤'이라는 영화를 영화관에서 봤습니다. 소리가 큰 건 둘째치고 좌우 앞뒤에서 쿵쾅쿵쾅 울리면서 베토벤의 '합창'이 온 몸을 감싸는데, 과연 소리란 귀로만 듣는게 아닌 온 몸으로 느끼는 것이구나 라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영화관은 이미지가 실제현실을 압도하는 곳이죠..


 

영화관에 가면 영화에 몰입하도록 강요됩니다. 위에서 말한 칸트식으로 얘기하자면 인지적판단과 도덕적판단은 무시하도록 요구받는 거죠... 미적판단, 즉 즐거운가 즐겁지 않은가를 느껴야 한다는 겁니다. 집에서 영화를 보면 이것 저것 메모하면서 볼 수도 있고 또한 다시 돌려보기도 할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다른 생각도 하면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영화관에서는 다르죠.... 영화표를 예약하고, 이를 출입구에서 끊고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현실과는 다른 영역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면 이곳에 몰입해야 합니다. 가끔은 옆사람과 눈을 마주치기도 하지만 크게 얘기하는 건 실례죠...



잘 만들어진 영화는 시작 5분 만에 관객을 휘어잡습니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영화의 이야기, 사운드, 화면에 몰입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 영화가 허구인지 아닌지, 도덕적인지 아닌지는 판단을 보류합니다. 이런 판단은 상영관을 나가야 가능하게 됩니다.



물론 재미없는 영화라면 얘기는 다르죠... 온 몸을 배배 꼬다가 그냥 잠들고 말죠....;;

 


그냥 여흥활동 즐기는 데 너무 심각한 의미 부여를 하는 것 같죠? ㅎㅎ




3. 전쟁영화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해야할까?



전쟁영화라는 장르가 따로 있을 정도로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매우 많습니다. 논지전재의 일관성을 위해 칸트를 계속 빌려오도록 하죠... ㅎㅎ


먼저 인지적 판단으로는 그 영화의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성이 있는지 판단해야 합니다. 전쟁영화는 아니지만 제가 어렸을 때 정말 감명깊게 본 영화 중에 '영웅본색'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봤지만 만약 제 자식이 본다고 하면 말릴 영화입니다. 그만큼 폭력적인 장면이 많이 나오고 또 이것이 아름답게 묘사된 영화죠...;;


'영웅본색'에는 총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양 손에 권총 한자루 씩 들고 마구 쏴대죠... 그런데 권총은 절대로 한 손으로 쏴서 명중 시킬 수 없다고 하죠...;; 그런데 주인공이 쏘는 건 쏘는 족족 명중합니다. 사실성에서 많이 벗어나는 영화죠... 이런 비판이 많이 제기된 탓인지 요즘 나오는 영화에서 권총을 쏘는 장면을 보면 두 손을 받치고 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도덕적 판단을 통해 영화를 본다면 전쟁이 일어나는 과정이 정당했는가? 또는 사람을 오직 전쟁의 도구로만 이용했는가 여부를 가려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전쟁영화의 가장 큰 딜레마가 상업영화에 도덕적 잣대를 얼마나 들이대느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당한 전쟁론'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이 세상엔 정당한 전쟁은 하나도 없습니다.


서양에서 제기하는 '정당한 전쟁론'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정통성 있는 정부에 의해 수행되는 전쟁, 두 번째는 정당한 이유에 의해 이뤄지는 전쟁, 세 번째는 올바른 수단으로 행해지는 전쟁 등 이 세 가지 요소가 부합될 때 그 전쟁은 정당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가장 문제되는 부분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요소입니다. 자신은 정당한 이유라고 우기는데 상대방이 인정을 안 할 경우, 아니 자신의 집단 내부에서 이 이유는 정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죠...


더 큰 문제는 바로 세 번째 요소입니다. 이는 전쟁을 수행하면서 민간인의 피해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현대전은 따로 전선이 존재하지 않는 전쟁입니다. 본격적으로 지상군을 투입하기 전에 대규모 폭격이 이뤄지죠... 이 때 민간인의 희생이 많이 일어납니다. 지상군이 투입돼서도 민간인의 희생은 피할 길이 없죠... 베트남전쟁을 그린 영화를 보면 많은 영화가 정규군에 의한 무자비한 민간인의 피해를 그리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영화로 '지옥의 묵시록'을 들수 있죠...



미적 판단의 잣대를 영화에 적용하면 그 영화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환타지를 심어주는가 여부를 가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감동적인 이야기, 멋진 화면, 그리고 웅장하면서 기억에 오래 남는 음악 등 이 세가지가 영화 속에서 얼마나 조화롭게 어우러졌는지 판단할 수 있겠죠... 이는 전적으로 연출자의 능력이 좌우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영화 비평이 집중하는 부분이 바로 미적 영역입니다.




4. 한국전쟁 60년을 기억하는 의도로 만들어진 '포화속으로'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이야기를 시작할 시기군요... ㅎㅎ 급하신 분은 1,2,3 모두 건너 뛰고 여기부터 읽으셔도 되겠습니다. ㅎㅎ 이 말은 서론에 해야겠네요...



먼저 이 영화는 '반공'영화가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랬습니다. 공산당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없진 않았습니다. 중간 부분에 한 꼬마인민군이 총을 들면서 인민해방, 미군괴뢰 등을 외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또 뒷부분에 가면 인민군 장교로 나오는 차승원이 피에 굶주린 괴물처럼 나옵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얘기 하겠지만 사실은 양쪽 모두 괴물이 돼버린 상태라 딱히 북한군만 부정적으로 묘사되진 않았습니다.



전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사실 별 생각없이 영화에 집중해서 보면 시간 때우기로는 볼만한 영화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전쟁이야기를 하면서 그것도 한국전쟁 이야기를 하면서 전쟁에 대한 고민없이 영화를 보는 게 가능할까요? 그런 의도로 만들어 성공한 영화가 있긴 있었습니다. 바로 '태극기 휘날리며'였죠.... 전쟁에 대한 고민 없이 장동건, 원빈의 두 멋진 배우의 연기와 화려한 전투 신 등으로 무장한 이 영화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뒀습니다. 사실 '포화속으로'를 제작하게 된 동기가 제작사 간의 경쟁의식의 발로로 기획됐다는 얘기가 있더라구요... 이런 얘기는 제쳐두고 '포화속으로'는 '태극기 휘날리며'를 의식한 면이 분명 있습니다.



배우의 캐스팅부터 '태극기 휘날리며'를 의식했습니다. 포스터에는 가장 앞에 나온 이름이 차승원이지만, 사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최승현과 권상우입니다. 굳이 대입하자면 최승현은 원빈에 권상우는 장동건에 대입할 수 있겠더라구요.... 좀 약한 듯 보이지만 강단 있는 학도병 중대장 최승현과 엄청난 전투능력을 보이면서 반항적인 권상우가 대비가 됩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반공영화로는 성공할 수 없기에 내세운게 바로 인간 사이의 정이죠... 처음에는 반목하고 싸우지만 나중에는 화해한다...;; 참 식상하지만 나름 감동을 줄 수 있는 공식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 공식 조차 참 어설프게 이용했더라구요...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 공식을 절묘하게 이용하면서 감동을 만들어냈습니다.



처음부분에 권상우가 최승현을 무시하고 깔보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보다 훨씬 약해보이는데다 나이도 어린데 먼저 전투를 경험했다는 이유 하나로 최승현이 중대장으로 임명됐기 때문이죠... 나중에 권상우 패거리가 사고를 쳐서 식량을 몽땅 불태워버렸는데, 여기서는 이 일을 계기로 권상우가 최승현의 말을 그런대로 듣는 걸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참 어설프다는 게 문제죠....;;;


그런대로 둘이 지내다가 차승원이 학도병에게 항복을 종용하기 위해 찾아옵니다. 사실 이 장면도 참 맥락없이 전개되는 부분입니다. 차승원의 카리스마가 빛나긴 하는데 상황 자체가 워낙 말도 안되다 보니 오히려 웃음이 나오더라구요... 비장한 음악이 흘러도 말이죠....;; 어쨌든 권상우는 말도 안되는 싸움은 집어치우고 도망가서 후일을 도모하자며 애들을 선동하고 최승현은 이를 제지합니다. 그리고 둘이 다툽니다. 여기서 한 학도병이 자신의 동생을 직접 쏴 죽이고(이 장면에서 전 눈물이 나오더라구요...;;) 울면서 홀로 진지로 향합니다. 이 장면을 본 권상우는 선동을 그만두고 자기 친구와 함께 그냥 떠납니다. 자기는 여기서 개죽을 당하지 않고 폼나게 싸우다 죽겠다면서 말이죠...;;


그 다음 전개는 이 영화의 최절정 막장구간입니다. 그렇게 떠난 권상우와 친구는 인민군 트럭을 발견하게 되고 이 트럭에 많은 양의 탄약과 무기가 있는 걸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둘은 이 트럭을 탈취해서 나중에 학교로 돌아와 전투에 참가하게 되고 권상우와 최승현은 극적으로 화해를 하죠... 제가 굳이 이 부분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영화를 보다보면 권상우가 그냥 도망가지 않고 트럭을 탈취해 다시 돌아올 게 눈에 빤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권상우는 말 그대로 람보마냥 엄청난 전투력을 뽑냅니다. 약해보이기만 했던 최승현도 이에 못지않은 전투력을 뽑내며 수많은 인민군을 사살합니다. 이를 본 인민군 장교 차승원도 분노 게이지를 올려가며 똑같이 엄청난 전투력을 발휘해 그 둘을 잡으려 듭니다. 이 부분은 워낙 사실성이 떨어지니 그냥 마음 비우고 셋의 싸움을 지켜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밖에도 어이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차승원이 항복을 종용하면서 2시간 후에 점령하러 다시 온다고 한 후 학도병들은 전투준비에 들어갑니다. 그 전에 최승현하고 권상우가 싸웠으니 정작 준비할 시간은 1시간 반 정도밖에 안되겠더라구요... 그 짧은 시간동안 그 많은 화염병을 만들어내고, 대전차진지 구축, 대전차화기 등을 만들어냅니다. 뭐 앞에서도 말했듯이 차승원이 찾아온 거 자체가 만화같은 일이었으니 그 이후 이야기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지켜봐야합니다. 안 그러면 불편합니다. (ㅡㅡ;;)


그런데 재미있는 건 시작할 때도 그렇고 끝낼 때도 그렇고 이 이야기는 실화라는 사실을 그토록 강조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엔딩롤에서는 지금까지 생존한 학도병들의 육성 메시지가 나옵니다. 사실 이 부분은 감동적인 부분입니다. 이런 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이렇게 풍요롭게 살지 모를 일이죠... 어쨌든 그렇게 사실성을 강조하고자 하면서 어째서 영화는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를일입니다.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허접한 장면과 얼빠진 이이기의 전개가 나오는데, 뭘 믿고 그토록 실화라고 강조했는지.... 정말 이야기의 소재가 아깝습니다. 학도병의 편지를 바탕으로 구성된 학도병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전쟁 이야기.... 얼마나 멋진 소재입니까?? 이 멋진 소재를 살리지 못한 책임은 응당 연출자가 져야할 일입니다.


이야기의 사실성 떨어진다는 점과 이야기의 맥락이 닿지 않는다는 부분을 본다면 인지적판단과 미적판단을 이 영화에 적용해 볼 때 이 영화의 완성도는 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닙니다. 바로 도덕적판단의 적용 문제입니다.



전쟁영화에 도덕적 판단을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습니다. 상업영화에 지나친 도덕성을 요구하는 건 사실 문제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한국전쟁 이야기일 경우에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엔 엄격한 도덕적 반성을 요구해야합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이고, 현재 진행될 지도 모르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응당 잘못된 전쟁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고, 그 어린 학생들을 전쟁에 내몰아야 했던 상황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이 영화의 문제입니다.


사실 그런 장면이 짧게나마 있긴 있었습니다. 최승현이 어머니에게 도착할지도 모르는 편지를 작성하는 장면입니다. 두 부분에 걸쳐서 나오는데 잔잔한 음악과 함께 나오면서 짧게나마 생각할 시간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짧은 게 문제죠... 두 장면 합해봐야 2분이나 될까요? 거의 2시간의 영화 중 성찰하는 시간은 단지 2분 뿐이라니... 너무 짧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르죠... 머리 식히려 영화보는 건데 뭣하러 이런 복잡한 걸 생각할 필요가 있겠느냐?? 다시 말하지만 한국전쟁 이야기는 이미 끝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재 진행되는 이야기이며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무엇이 같은 민족을 그 전쟁에 몰고 들어갔는지, 어째서 제대로 총도 만져보지 못한 학생들이 전선에 투입돼야 했는지, 국군은 어째서 학도병과 끝까지 함게 하지 못하고 그들만 남겨둔 채 낙동강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는지.... 그런 물음이 응당 제기돼야 하며 또 어설프게나마 해답도 제시해야 합니다. 저 물음 중에서 마지막 물음만 빼고는 나머지 물음은 영화에서 제기 되지 않았습니다. 각자 생각할 일이고, 만약 생각하지 않을 사람은 그냥 넘어갈 일입니다.


이건 큰 문제입니다. 기껏 한국전쟁을 그린 영화를 봤는데 이런 성찰조차 하지 못하고 넘어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혹시 한국전쟁을 우리의 이야기로 인식하지 못하고 티비나 인터넷 또는 다른 영화에서 봐오던 전쟁 처럼 다른 곳의 전쟁 중 하나 처럼 인식하는 게 아닐까요? 만약 이러다 정말 이 땅에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어떨까요? 이런 성찰도 못해 본 채 전쟁에 투입된다면 그저 저 앞의 적들을 상부에서 시키는대로 까부숴야 되는 괴물로 인식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정말 괴물이 될 자는 누굴까요?


전 앞에서 차승원만 괴물이 아니라 그에 맞선 최승현과 권상우도 괴물이 됐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전쟁은 쌍방을 모두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진정한 '괴물'입니다. 아직도 제가 상업영화에 지나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고 생각하신다면 '지옥의 묵시록'이나 아리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두 영화가 어떤 물음을 당신에게 묻고 있는지 말입니다.


이 영화는 너무도 가볍습니다. 너무도 무겁고 무서우며 또 실제의 소재를 너무도 가볍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이상 이 영화를 마음편히 볼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덧붙이기 1) 이 영화를 너무 까기만 했는데 몇 부분은 정말 칭찬하고 싶습니다. 먼저 최승현의 연기입니다. 전 그저 아이돌 가수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에서 보여준 최승현의 연기는 정말 훌륭했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에 나온 원빈보다 더 훌륭한 연기를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배우입니다.


반면 권상우는 그 이미지를 깨기가 힘들 거 같더라구요... 삐닥하고 반항적인 학생 이미지 말이죠.... '동갑내기 과외하기' 부터 '말죽거리 잔혹사' 등에서 보여준 그 이미지를 '포화속으로'에서 그대로 재현했습니다. 권상우가 앞으로 배우로 롱런하기 위해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한가지 권상우에게 칭찬해줄 일은 있습니다. 과연 육군 조교다운 모습을 보여주더라구요... 총 쏘는 거부터 해서, 포복하기, 칼 던지기 등등... 만약 이 영화를 보신다면 갈대밭에서 권상우가 보여준 앉은포복(맞나? ㅎㅎ)을 눈여겨 보실 일입니다. ^^;;


차승원의 연기도 훌륭했습니다. 역시 섬세함을 아는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캐릭터 자체가 지나치게 만화적인 캐릭터라 몰입하기는 힘들더라구요... 김승우는 별로 나오지 않으니 패스~~~;;


전투장면이나 폭파 장면에서는 정말 돈 많이 들였다는 생각이 나긴 하는데 멋지다는 생각은 별로 안들었습니다. 탱크 두대를 동원하고 모두 폭파 시켰으니 말 다했죠...;; 그런데 역시 전쟁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제 맛 아닐까요?? 집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압도적인 사운드와 화면 등등...;;



(덧붙이기 2) 영화관 바로 밑이 백화점입니다. 영화관이 백화점 제일 꼭대기에 있어 올라갈 때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는데 내려갈때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그냥 아이쇼핑이나 해볼려구요.... 한국전쟁 이야기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보고 자본주의의 총아인 백화점을 구경한다.... ;;;; 무언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하더라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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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示  (0) 2010.12.06
posted by namasca
2010. 12. 6. 15:39 Miscellany

오늘 경향신문에서 한 칼럼을 읽었습니다.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가)
 

지난 한 달 동안 세계에서 일어난 주요한 세가지 사건.. 이란 대선 불복시위, 온두라스 쿠데타, 그리고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유혈참사를 되돌아 보면서 과연 자유와 평등 인권이 진정으로 신장되었는지 묻고 있는 칼럼입니다.


위에 나온 세 사건은 분명 역사의 후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뭐 멀리 볼 것도 없이 현재 이명박정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사건 사태만 봐도 역사는 뒷걸음질 치는 것 같습니다. 훈훈했던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얼어붙었고, 용산 참사 주인공들은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찰과 검찰, 국정원, 국세청은 똘똘 뭉쳐 현 정권을 보위하는데 진심전력을 다하고 있고, 서민들의 삶은 나날이 팍팍해져 가고 있습니다. 어제 신문 기사를 읽어보니 소득 10분위 최상위층과 최하위층의 소득격차가 10.67배를 넘는다고 합니다. 올해 1/4분기 동안 10분위(최상위층)의 소득은 3.4% 늘어난 데 반해 1분위(최하위층)의 소득은 9.7% 감소한 결과입니다. 더 우울한 결과는 가처분소득격차는 더 벌어졌다는 사실입니다. 10.67배에서 11.12배로 벌어져 세제를 통한 부의 재분배는 커녕 오히려 빈부격차를 확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상·하위 10% 소득격차 사상최대)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저는 무모하다고도 할 수 있는 주장을 하려고 합니다. 저는 역사는 진보한다고 생각합니다. 올 초 한겨레 아카데미를 다녔을 때 가장 처음 쓴 논술 주제가 바로 '역사는 진보하는가'였습니다. 그 주제에 대해 저는 자유와 평등이 확대되고 인권이 점점 더 존중받기 때문에 역사는 진보한다고 논했습니다. 그런데 논거를 살펴보니 조금 빈약하더라구요.. 논거로 제시한 게 시계나 냉장고 또는 수학공식 과학지식 같은 물건이나 지식의 확대를 자유의 신장으로 보고 이것들이 널리 퍼지는 것이 평등의 확대라고 해석했습니다. 또한 자본주의의 확대를 자유의 확대 민주주의의 확산을 평등의 확산으로 보고 현재 자본주의의 민주주의가 전 세계에 널리 퍼졌기 때문에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확산됐다고 논했습니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자본주의의 확산은 자본의 무차별적인 확대에 지나지 않았고 민주주의의 확산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닌 의사민주주의(pseudo democracy)의 확대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김수행교수님은 '자본주의의 경제의 위기와 공황'에서 물질적 기반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본은 무한정 확대됨으로써 자본주의 기반 자체가 흔들려 불황이 지속된다고 하셨습니다. 자본주의가 본격화된 18세기 이후 자본주의의 역사를 보면 이 명제는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이렇게 생존을 거듭하고 있다는 걸 보면 자본주의라는 괴물은 엄청난 적응력과 생존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진국의 민주주의는 엘리트주의로 변질되고 있고 (이에 대해 자카리아는 오히려 책임성을 방기한 엘리트의 부상을 염려합니다. '자유의 미래' 참조) 개도국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독재정권이 많습니다. 여전히 민주화의 길은 멀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역사의 진보를 외치는 이유는 세상은 좀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선 세대의 경험과 지식이 나중 세대에 전달되면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뒷걸음질 치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는 오래되지 않아 곧바로 교정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의 폐해와 엘리트주의 독재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도 이런 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무조건적으로 유토피아를 강요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우리는 예전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치독일의 전체주의, 소련의 중앙집권, 북한의 주체주의 등등.. 일방통행식의 유토피아 건설은 언제나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고 결과는 파국으로 나타났습니다.(북한의 경우는 파국으로 가고 있다고 표현해야겠네요)

역시 중요한 것은 일방통행이 아닌 소통과 교류라고 생각합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따라서 저도 책상 앞에서 책만 읽지 말고 인터넷을 통해서라도 소토을 해야 할 것 같아 이 블로그를 열게 되었습니다.

이 블로그의 제목은 'Ecology + Economy + Ethics → Evolve Earth' 입니다. 뭐 거창한 뜻은 아니고 생태학과 경제학 그리고 윤리학이 만나면 지구에 큰 변화가 오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 정했습니다. 유진 오덤이라는 위대한 생태학자의 생태학 교과서 가장 뒷부분을 보면 살아가는 곳에 대한 연구인 생태학과, 사는 곳에 대한 관리인 경제학이 통합되고, 윤리학이 연장되어 인간의 가치와 환경의 가치를 동시에 고려할 수 있을 때, 인류의 미래는 낙관적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3E인 생태학(ECOLOGY), 경제학(ECONOMY), 윤리학(ETHICS)을 하나로 묶는 것은 궁극적인 총체주의이며, 우리의 미래를 위한 위대한 도전이 된다고 합니다. 비록 배운 것도 짧고 생각도 깊지 않지만 저는 이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생태학이나 경제학 또는 윤리학은 거창한게 아닙니다. 생태학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네 주변의 하천이나 뒷산 이야기이고, 경제학에서는 주번 사람들 살림살이 정도에 국한해서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윤리학도 뭐 마땅이 무엇을 해야한다가 아니라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하는 정도로 얘기 해보려고 합니다.  

 전부터 계속 해보자해보자 마음만 먹었지 하지 않았는데 이제야 시작했습니다. 이 블로그를 통해 좋은 분들과 진솔한 얘기를 많이 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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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masca
2010. 12. 6. 15:36 Miscellany



 

이거 홧김에 해버렸는데 어쩌지?? 어쩄든 블로그 개시를 했으니 잘해봅시다~! 

아... 갈길이 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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